혹부리 사내 =안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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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부리 사내
=안영미
사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건 157번 버스가 청량리 굴다리를 막 지나갈 때였다 밤새 홍등이 내걸렸던 골목에선 비릿한 사향 냄새 안개처럼 풀려 나오고 그 골목의 꽃들은 흡반처럼 그 안개를 빨아먹고 흐드러지고 있었다 수상하다면 수상한 날이었지만 수상하지 않은 날이 더 수상한 그 골목에서 그러니까 일상이 수상한 일들로 반복되는 그 골목에서 부리부리한 사내의 출현은 그닥 수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 골목의 포주들은 함부로 씨를 뿌리고 가는 사람들에게만 상냥했고 아침의 행인들은 무관심함을 가장했다 그 상냥함과 무관심 사이에서 사내는 어떤 환영처럼 유리벽 속에서 걸어 나왔던 것인데 사내는 왼쪽 볼에 씨방 같은 혹을 달고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나를 일갈한 뒤 수상하다면 수상한 벽처럼 걸어갔다 사내로부터 환청처럼 어떤 여자의 비명 소리 안개처럼 풀려 나오고 수상하다면 수상하게 그 골목의 꽃들은 환상처럼 혹을 매달기 시작했다
문예중앙시선 008 안현미 시집 곰곰 29p
얼띤 드립 한 잔
재밌게 읽었다. 시를 쓸 때 시어 하나를 고르는 것도 유심히 살펴야겠다. 혹부리 사내, 혹부리는 얼굴에 혹이 달린 모양이지만, 혹+부리처럼. 사내는 자다. 이 시에서 포주, 행인, 사내, 나, 여자는 모두 자의 대역이다. 157번이라는 숫자, 마치 시리즈로 펴낸 출판사의 권호처럼 읽힌다. 이 시집은 문예 중앙 시선 29번 이니까 29번 버스다. 버스는 자를 한꺼번에 실을 수 있는 통행수단이다. 청량리, 맑고 밝은 청량淸亮이든 맑고 서늘한 청량淸凉이든 혹은 맑고 어진 청량淸良이든 무언가 모의라도 일으킬 듯한 곳 그 마을로 간다. 굴다리, 굽을 굴屈과 파다, 파내다 굴掘에서 다리는 이쪽과 저쪽의 연결수단으로 작용한다. 물론 연결수단으로 보지 않아도 수많은 어떤 이치를 담은 것으로 보아도 크게 무관하지는 않겠다. 홍등, 홍어나 홍시, 홍차 홍으로 시작하는 시어는 붉은 감정을 암시한다. 시에 대한 열정이다. 안개, 물론 자연현상이지만 속에 든 개처럼 물고 뜯는 일을 생각하면 시를 읽는 독자의 의무겠다. 부리부리한, 형용사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논리로 눈망울은 크게 열고 포주는 기둥서방이지만 안을 포抱로 본다면 시를 읽는 주체다. 왼쪽은 항시 죽음이 머무는 공간이다. 이에 비해 오른쪽은 삶을 대변한다. 시는 혹부리 사내며 시를 읽는 이는 포주라 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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