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슬픔의 숲 =안차애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환한 슬픔의 숲
=안차애
아파트도 한자리에 오래 자리잡다 보니
나무가 되어가나 보다
오래도록 바람에 가슴 뜯기며 살다 보니
뿌리가 생겼나 보다
요즘 들어 부쩍 창만 열면 새소리가 바쁘다
새들이 드디어 아파트에 나무처럼 깃들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앞 베란다 창에서
오후 설거지 무렵이면 부엌 창 쪽에서
낮고 높은, 강하고 여린 주파수를 보내온다
그러고 보니
네가 오랜 여행을 떠나고 혼자 남겨진 뒤부터다
오래 남겨진 아파트
오래 남겨진 공터 오래 남겨진 가슴 한편
새들은
꼼짝없이 한자리에 서서
슬픔의 뿌리만 내리는 것들에 제 둥치를 얹는다
지상엔 환한 슬픔의 숲이 하나 더 느는 것이다
문학 세계 현대 시선집 199 안차애 시집 치명적 그늘 116p
얼띤 드립 한 잔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다 보면 말 없는 것들과 자연스레 친구가 된다. 가령 젊을 때 마련한 집이 벌써 삼십 년째 동거하며 지내니까 나도 나무가 되었고 집도 나무가 되었다. 나무, 벌거벗을 나羅에 없을 무無처럼 딸딸 털려버린 이파리처럼 가을이 왔다. 지난해는 빗물이 새, 없는 돈 긁어모아 지붕 공사를 했고 뜰앞은 다 헐어 공사를 재개해야 할 판이지만 거저 눈여겨 지켜본 지가 또 얼만가! 하나씩 벗을 때마다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한 해씩 떨궈버린 나이도 우습게 바라볼 때가 아니다만 이젠 힘이 없고 희망도 사실 없다. 매사 가슴 떨리는 일도 없으며 그렇다고 나 찾는 새들이 있나 계좌를 받쳐 줄 우산이 있나 다 까발려도 어디 새 나올 곳 없는 빈틈없는 가슴 졸임만 있을 뿐이다. 그래도 살아 숨 쉴 수 있는 마음은 네가 있어, 너의 몸에 안겨 잠을 청하고 너의 몸에 안겨 업무를 보고 네가 준 물에 샤워하며 지내는 일, 잊지는 말아야겠다. 너에게 안겨준 고통이란 얼른 대출금부터 삭제하는 일이란 것도 잘 안다. 창만 열면 새소리처럼 울리는 알람에도 얼마 쌓아놓지 않았음에도 월말이면 매번 설거지 당하는 은행나무 이파리도 낮고 높은 강한 여린 주파수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행은 내가 아니라 너였으면 하고 바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영영 떠나라 하며 공터에다가 발을 둥둥 쳐보기도 했지만 남는 건 역시 올곧게 서 있어야 할 나무의 기둥 발뿐이었다. 그래 나는 꼭 이것만큼은 정리할 수 있을 거라 다짐해본다. 그러니까 나는 할 수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