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함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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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94회 작성일 25-01-08 21:15본문
당신
=함기석
잘못 펼치셨습니다 그냥 넘기세요 당신은 잘못된 페이지입니다 당신은 당신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사건 현장입니다 당신은 당신 사체가 흰 천에 덮여 있는 골목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접근 금지 구역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한히 갈라지는 당신 내부에 갇혀 있습니다
북쪽으로 모자와 시계들이 둥둥 떠다닙니다 남쪽에선 이빨이 썩은 코스모스들이 악취를 풍기며 웃고 있습니다 서쪽에선 고양이들 교미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동쪽에서 아기 울음소릴 내며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이해될 수 없는 장소입니다 당신은 빨간 노끈으로 차단된 검시 현장입니다 당신이 흘리는 시간이 흰 천을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유일한 목격자, 당신은 영원한 미궁입니다 당신 사체 옆의 당신 사체 옆의 무한 사체들
잘못 펼치셨습니다 당신은 썩어가는 페이지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악취로 파리와 쥐 떼를 부르는 기이한 골목입니다 당신은 죽어서도 음모와 발톱이 자라는 도형, 당신은 무한히 갈라지는 무한개의 폐곡선입니다 찢어버리세요
문학동네시인선 168 함기석 시집 음시 026p
얼띤 드립 한 잔
시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 그리움과는 떨어질 리야 떨어질 수 없는 일심동체다. 그러므로 시의 만남은 이상이자 목표며 늘 죽음을 부르지만 도전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자아는 분열되고 배척할 수도 없는 존재에 감시의 대상이기도 하다. 잘못 펼치셨습니다. 대면하자마자 인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식에 대한 실패로 끝나기에 그냥 넘겼으면 하는 하루, 아예 도전에 대한 자세부터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헤딩을 당해버린 나머지 널린 저 시체들에 하나 더 얹는 일이므로 싫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우연은 안 된다. 어떤 한 사건을 대하는 것도 반드시 계획이 있어야 하고 그 계획에 프로그램화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아침은 건너뛰는 것이다. 구태여 더러 붙지 말며 기어이 흔적 같은 것은 남기지 말라는 말이다.
두 번째 단락, 동생 아니 동체에 대한 현재 직시한 상황을 묘사한다. 동서남북 방위로 말이다. 시에서 북은 객체를 묘사한다면 남은 시적 주체다. 동은 늘 혁명이 움트는 곳이면 서는 죽음의 공간이다. 북을 묘사한 모자와 시계는 머리에 쓰는 물건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시의 시야를 가늠한다. 남에서 사용한 주목할 만한 시어는 역시 코스모스다. 질서와 조화를 이룬 우주관 즉 시의 세계다. 서는 고양이 교미 소리로 진동한다. 얽히고설킨 오로지 진땀만 빼고 있다. 뭔가 달라붙어 뭔가 끄집어내려고 하는 측과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안 주려고 끝끝내 붙들고 있는 상황까지 사실, 안 주려고 하는 건 아니다. 거저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에 다만 못 따먹는 당신만 있을 뿐이다. 동은 여전히 아기처럼 미숙한 상태로 비만 내린다.
세 번째 단락, 내가 던진 과오와 실수는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 일의 성급함과 심사숙고하지 못한 결단에 일의 낭패는 슬픔과 분노를 자아내게 하고 그 끝에는 연민으로 닿을 것이다. 아니 죽음도 두렵지 않은 부끄러움에 몸서리칠지도 모른다. 이러한 일의 발단은 모두 당신이며 당신이 목격자이므로 이 미궁을 헤쳐나가야 할 자 또한 당신만이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극단적인 표현만 쓴다. 사체와 사체와 사체들 속에서 나뒹구는 자아에 대한 검시 현장을 두고 오로지 빨간 노끈으로 묶어두고 있다.
네 번째 단락, 점점 곪는다. 썩는다. 악취가 풍기고 파리와 쥐 떼를 부르는 기이한 골목이다. 파리, 어떤 한 이치가 번개처럼 깨뜨리는 일, 쥐떼 하찮은 일도 다시 더 한 번 보는 일에 경련처럼 닿는 어떤 원칙의 발견, 그 눈을 가져야 한다. 늘 죽음을 불렀지만 그건 새로운 생식을 위한 밑거름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음모와 발톱은 자라고 무한개의 폐곡선처럼 부풀어 언젠가는 그 안쪽이 아닌 바깥을 향한 마음을 표출할 때가 올 것이다. 다만 오늘의 실패는 분명히 하고 다시 찢는 일이 있더라도 펼쳐 갈기되 반드시 원인 규명은 있어야 할 것이다.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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