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의 생시 =윤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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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의 생시
=윤의섭
내가 이 해안에 있는 건
파도에 잠을 깬 수억 모래알 중 어느 한 알갱이가 나를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듯 발자국은 보이지 않고
점점 선명해지는 수평선의 아련한 일몰
언젠가 여기 와봤던가 그 후로도 내게 생이 있었던가
내가 이 산길을 더듬어 오르는 건
흐드러진 저 유채꽃 어느 수줍은 처녀 같은 꽃술이 내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처녀지를 밟는다
꿈에서 추방된 자들의 행렬이 산 아래로 보이기 시작한다 문득
한적한 벤치에 앉아 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바다는 계속해서 태양을 삼킨다
하루에도 밤은 두 번 올 수 있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나는 생의 지층에 켜켜이 묻혔다 불려 나온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07 윤의섭 시집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7~8p
얼띤 드립 한 잔
바다와 모래알은 하나의 대립각을 이룬다. 그러면서도 그 성질은 같은 것일 수도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는 단면을 이룬다. 모래는 모래고 바다는 바다다. 모래가 바다를 이룰 순 없고 바다가 모래로 전향할 일은 없다. 여기서 바다는 이상향이다. 바다만큼 풍족하고 바다만큼 넉넉한 것도 없다. 모든 씨앗의 발원이기도 하고 그 씨앗의 생명수이기도 하다. 내가 이 산길을 더듬어 오르고 있는 건 길가 흐드러지게 핀 저 유채꽃 어느 수줍은 처녀 같은 꽃술 때문만은 아니다. 수줍음을 없애고 처녀를 지우고 꽃술에 낀 독까지 훨훨 날려 보낼 수 있다면 그 독기가 바다에 닿는다면 나의 삶은 좀 더 건강해질 수 있을까! 하루에도 밤은 여러 번 찾아오고 고개를 기울일 정도의 졸음마저 삼키는 뱀의 면밀한 저작은 나를 더욱 폐쇄적으로 만들 뿐이다. 구불구불 지나가는 곡선의 저 아름다움에 미쳐 날뛰는 개구리 하나가 생판 아무런 뜻도 모르고 히죽거리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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