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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진 시집 (빈총잡이 저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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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7회 작성일 24-12-26 08:25

본문

『서평』 문학의 창가에서 생명을 보듬어 가는 시간



 



김 진 시집 (빈총잡이 저격수)를 읽고


글/ 김부회 시인, 문학평론가, 수필가



가. 들어가며


우리가 시를 쓰는 목적을 잠시 생각해 본다. ‘시’ 한편에서 과연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마음의 프리즘을 통한 자기만의 색으로 채색된 또 다른 각도의 풍경들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는 그 문학적 가치 이전에 삶의 개인적인 질곡과 에피소드를 행간으로 만들어 타인과 공유하는 어떤 소통의 매개체라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소통의 매개체라는 말이 중요하다. 혼잣말은 상대방이 없는 말이다. 자신에게 자신이 하는 말이다. 하지만 작품은 자신의 경험과 사고, 느낌을 어떤 대상에 비유하거나 간접적 경험에 반추하여 독자에게 자신을 온전히 전달하는 작업이기에 소통의 매개체라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문장은 단순하게 소통의 매개체에서 벗어나 울림이 있어야 한다. 어느 한 지점에서 느껴진 감정의 편린이 하나의 느낌표 혹은 페이소스 pathos, 혹은 온도가 되어 상대방에게 전달될 때 문장은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 줄의 글이나 한 줄의 행간 하나가 감동이나 격동의 울림을 줄 때 그 작품은 살아있는 작품이 되며 동시에 혼을 가진 작품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글을 쓰면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 그 지점이다. 거짓이나 fiction에 기반한 글들은( 소설 등을 제외한 글의 포괄적 진정성을 이야기한다.) 작품의 가치, 수사의 화려함에 비해 작품성이 많이 떨어진다. 진솔한 말을 진솔한 느낌으로 진솔하게 전달하는 것이 시 쓰기의 가장 기본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부분이다. 시의 가장 큰 매력은 진정성이다. 화려한 언변의 수사적 기법이 아니라 기술적 문장의 비틀림과 미래파적인 애매하고 모호한 언어적 기호의 나열이 아닌 심중에 놓아둔 말 한마디에서 사람의 감정은 변화하고 공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달에도 수백 편 이상의 시집이 시집이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집이 열정이라는 덕목을 제외하면 더 이상 신선하지 않다. 이미 많은 사람이 비슷한 모양의 시를 짓고 A = a’라는 덧칠을 하였기에 더 이상 읽을 매력을 주지 못하는 작품집도 많이 있다. 사람의 생각은 다 다르면서도 다 같다고 말하면 아이러니가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이번에 한국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 강 작가의 작품 (채식주의자)에서 작가가 말한 ‘감정은 언어를 초월한다.’라는 말에서 많은 공감을 한다. 언어를 초월하기도 하지만 언어를 비슷하게 묶기도 한다. 감정과 언어는 대립의 인과 관계가 아니라 수평의 기울기를 갖고 있다. 감정에 묻어나오는 것이 언어이며 문장일 것이며, 그것은 내 생각의 근원점이며 동시에 소실점이기도 하다는 양면성을 갖고 있기에 언어를 부리고 사용하는 것에 대해 밀도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언어를 형상화한다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이다. 말이나 생각은 쉽게 계량화할 수 없다. 단위나 잣대를 선택적으로 삽입하여 상대적 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 문장이다. 다만, 어느 순간 어느 지점의 내가 문장이 되어 상대방에게 울림을 줄 수 있다면 그 평가가 절대적 평가로 치환되는 것이기에 시를 쓴다는 것은 경전을 다듬는 일이며, 마니차를 돌리는 일이다. 마니차에 대해 잠시 인용해 본다.


마니차(摩尼車, 티베트어་)는 주로 티베트 불교에서 사용되는 불교 도구이다. 마니차는 원통형으로 되어있으며, 측면에는 만트라가 새겨져 있다. 내부에는 롤로 경문이 새겨져 있다. 크기는 다양하며 손에 쥘 수 있는 크기부터 큰 것은 몇 미터에 달하는 마니차가 사원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위키백과 인용」


독경이나 수천 배의 절을 하며 구도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돌리기만 해도 도를 얻을 수 있다는 불교의 수행 도구가 마니차다. 필자의 견해로는 한 권의 시집은 하나의 마니차와 같다는 생각이다. 그저 눈으로 따라 읽기만 해도 그러다 어느 한순간 한 단어, 한 행간, 한 문장에 득도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경전이며 수행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를 쓰는 것은 그 경전을 만드는 일과 같은 작업이다. 손으로 돌리기만 해도 얻을 수 있는 득도의 경지를 시집 안에 넣기 위해서 내 작품 역시 같은 구도의 자세로 시를 써야 한다는 이론이 성립한다. 시가 그렇다. 내가 먼저 감동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고, 내가 먼저 세상을 보는 바른 눈을 가져야 감정을 초월한 언어가 생성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른 세상을 지탱하고 유지하고 미래의 지향점을 만들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다. 그저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말하고 쓰는 것은 언술이다. 언술에는 무게와 깊이가 부족하다. 감정을 초월하지 못한 단어들이 난무할 수 있다. 그런 언어들의 조합을 하는 역할이 시에는 부여되어 있다. 좋은 시를 선별하는 기준은 매우 많다. 하지만 아주 쉽게 좋은 시를 판별하라면 모든 수사를 제외한 시인의 눈빛을 먼저 손에 꼽고 싶다. 시집을 만든 시인의 눈빛, 그 온도가 따뜻해야 한다. 시선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개인사에 따라 긍정과 부정이 교차할 수 있다. 하지만 글의 온도는 따뜻해야 한다. 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이다. 생각 그릇에 담긴 생각의 무게는 부정도 긍정으로, 긍정도 부정으로 만드는 희석의 그릇이다. 시인은 세상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노래하는 사람이 아니다. 반대로 처절하고 아수라로 묘사하고 노래하는 사람도 아니다. 보이는 것의 표면을 넘어 보이지 않는 배경을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진 시인이라면 모든 사물과 현상에서 시인만의 눈빛으로 조망한 세계가 보일 것이다. 그 세계를 공유한다는 것이 이 가을에 시집을 읽는 일이며 이유가 될 것이다.


김 진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를 살펴보며 가장 주목한 것인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의 두께와 조밀함이다. 단순히 여과되지 않은 과도한 감정의 표출이나 보여주기식의 문장이나 지식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김 진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의 온도는 따뜻하다. 삶을 바라보는 기울기의 평형점은 늘 수평이라는 점이다. 다른 한 가지 장점은 포용이라는 단어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현상이나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넓이를 포용하는 시인의 품이 넉넉하고 때론 고즈넉하다는 점이다. 가끔은 일인칭에서, 가끔은 이인칭에서, 또 아주 가끔은 삼인칭에서,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지만 결국 귀결점은 따뜻한 포용이라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김 진 시인은 말한다.


<작가의 말>


20대에서 현재 40대 후반까지, 추린 시가 몇 편 되지 않습니다. 시를 써야겠다는 특별한 목적이나 사명 없이 그저 몇 글자씩 쓰기 시작한 것이 세월이 지나 이제 나도 시인이 돼볼까, 하는 상황까지 온 것입니다.


때론 꽤 시에 몰두한 시기가 있고 아예 손 놓았던 시기도 길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지금 시라고 내놓는 것들이 그사이 공중 분해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를 쓴 시기가 따로따로이다 보니 색깔이 들쭉날쭉합니다. 다만 세태가 어떻고 흐름이 어떻고를 떠나 내 것 그대로를 담은 것에 의미를 둡니다.


병듦에서 치유됨까지 치유됨에서 또 병듦까지 반복되는 불안한 굴레에서 나는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 또 어떤 행세를 해야 하는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들쭉날쭉 종잡을 수 없는 나를 이 시집 안에 글자로 잡아 두고 한 걸음 한 걸음 온전함을 향해 가기를 그리고 앞으로 더 좋은 시를 써보기에 심혈을 기울이겠습니다.


「작가의 말 전부 인용」



병듦에서 치유됨까지 치유됨에서 또 병듦까지 반복되는 불안한 굴레에서 나는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 또 어떤 행세를 해야 하는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라는 작가의 말은 대단히 의미 있는 말이다. 그 말은 시인 자신에게도 시를 읽어줄 독자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며,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타인의 위치에 대해서도 같은 고민을 하게 마련이다. 동등한 시선의 배려는 결국 타인을 치유하게 만드는 어떤 눈높이를 만드는 과정 중의 하나이다. 김 진 시인의 시집 속 76편의 작품들이 대부분 직설적인 화법에 자신의 온도를 섞어 빚은 어쩌면 무채색에 가까운 빛을 함유하고 있다. 시의 질감에 유채가 아닌 무채색을 입힌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다. 수많은 덧칠을 하거나, 아무 덧칠도 하지 않거나. 아마도 필자의 생각엔 후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덧칠의 범벅이 아닌 본래 자신이 소유한 색감을 담담하게 수묵화처럼 펼쳐 놓은 것에 눈길이 간다. 얼굴 보며 대화한 적은 없지만 아마도 김 진 시인의 겸손과 무량한 배려의 폭을 가진 시인일 것이다. 또한 생명을 대하는 자세가 정말 생명을 대하는 사람의 자세일 것이다. 이 서평의 소제목을 「문학의 창가에서 생명을 보듬어 가는 시간」이라고 명명한 이유다. 한 편 한 편 김 진 시인의 시를 들여다보며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묵상의 시간을 가져보고 싶은 가을이다.


나. 들여다보기



막대기



눈 내린 산중에 굴러다니는 막대기가 그럴싸하다

눈길에 꽤 쓸 만하겠구먼


한동안 지팡이로 잘 쓰고

산에서 벗어나려 할 때는 필요 없어졌다

잘 사용한 물건을 막 버리기가 마음에 걸려

무릎까지 쌓인 눈더미에 막대기를

깊숙이 박아 세운다


막대기는 그 자리에 반듯이 선 채로

겨울 숲 여느 나무들과 함께 한다


겨울은 혹독하고 길다지만 가긴 간다

숲에는 어느새

연둣빛 전령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어디 앉을까 자리 찾다가

새가 고른 것은 막대기였다


새가 막 앉을 찰나

......스르르 쓰러지는 막대기

새는 막대기에 앉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조금만 더 버텼어도 잠시나마 새를 앉혔을 것인데

눈은 녹아 사라지기 마련


한 시절 그럭저럭 서 있다 가는 막대기


「막대기 전문 인용」


막대기는 가늘고 긴 나무토막이다. 어느 나무에서 떨어져 나왔거나 자르고 남은 그저 그런 나무토막이다. 시인은 그저 그런 나무토막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눈길에 쓸 만한 지팡이로, 그렇게 쓰다 툭 던져 내버리면 그만인 것을 막 버리기가 아까워 눈 속에 깊이 박아둔다. 어느새 봄이 오고 새 한 마리가 막대기에 앉으려다 그만 막대기가 쓰러져 버린다. 그러면서 ‘눈은 쓰러지기 마련’이라는 행간을 슬며시 놓아둔다. 새가 앉지 못한 막대기와 녹은 눈. 겨울은 그렇게 생명을 다하고 봄이 오고, 막대기는 다음번 누군가 지팡이로 쓸 수 있게 다시 산에 눕는다. 한 시절 그럭저럭 서 있다 가는 막대기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럭저럭)이라는 부사를 효용성 있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아무렇지 않은 에피소드 하나에서 삶의 모습을 발견했다. 돈, 명예, 부의 축적, 그런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이 그럭저럭 살다 가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필요한 사람에겐 필요한 것이 되어 주고, 섭리의 한가운데 서 있다 다시 쓰러지는 막대기와 우리네 인생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 어쩌면 다른 점이 아닌 같은 점을 의뭉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별일 없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알 때가 있다. 누가 아픈 것이나 누가 다친 것이나 전쟁이 나거나 정치가 요동치거나 하는 일 없이 순조롭게 삶의 메뉴얼대로 어제와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것이 평화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 때가 있다. 최근의 혼란한 현대사회에서 막대기처럼, 아니 막대기가 되어 그럭저럭 산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다. 시인은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막대기는 막대기에서 내가 되고 당신이 되고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을 빗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작은 생명 하나를 보듬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염소야



비 오는 날 종일 하천에 묶여있는 염소가 안쓰럽다.

고스란히 비를 맞고 서 있다.

까불이 백구처럼 지붕 달린 아담한 집 속이라도 좋으련만.


염소야,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벼락 치면 벼락 치는 대로

하천이 넘치면 넘치는 대로,

들개무리가 달려들면 달려드는 대로

그대로 고스란히 당해야 하니.


저 염소를 내 손으로 풀어주고 싶으나.......

염소야, 내 팔자를 묶은 매듭도 만만찮은지라.


「염소야 전문 인용」


하천에 묶여있는 염소 한 마리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을 생각해 본다. 본문의 말처럼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벼락 치면 벼락 치는 대로 고스란히 당해야 하는 묶임. 그러면서도 풀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담겨있다. 결구에서 반전의 매력이 돋보인다. 내 팔자를 묶은 매듭도 만만찮은지라 하는 말에서 애잔한 삶의 동질성을 느낀다. 필자 역시 보이는 매듭에 묶이지는 않았지만 삶이라는, 인생이라는, 사람과 사람이라는, 관계와 관계라는 모든 행동의 반경 속 인과 관계에 묶여 사는지라 염소의 묶임이 다만 묶임에 그치지 않고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묶임조차도 순응하는 자세로 산다면 그렇게 심하게 타박할 것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세상 만물에는 주어진 역할이 있다. 막대기는 막대기대로 염소는 염소대로 나는 나대로. 모두가 같은 것이 주어졌다면 세상은 좀 더 아름다울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풀어주고 싶어도 풀어줄 수 없는 마음과 묶여있어도 도망가지 못하는 마음은 각자의 몫이다. 그것은 도망가고 싶은 마음에 기울기 비중을 더 두거나 풀어주고 싶은 마음에 비중을 더 둘 때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순리를 이탈한 궤적은 늘 천형으로 다가오게 마련인 것이 인생인 것이기에 그저 보면서 안쓰러워하는 시인의 심정이 아릿하지만, 공감이 간다. 살다 보면 많은 것들이 생각하지 못하게 나를 괴롭히거나 다가오거나 어쩔 수 없이 방어하게 만든다. 그 모든 시련 앞에서 순리를 무시하거나 망각하는 행동은 이율배반적이며 공격적인 삶을 영위하게 만든다. 사건 사고의 원인행위가 그것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김 진 시인이 바라보는 묶인 염소는 김 진 시인 자신이기도 하며, 우리이기도 하다. 너와 내가 사는 모습이 같으니 같이 위안이나 되고 싶은 것이다. 저항이나 반항이 아닌 그럭저럭 의 범주에 해당하는 일이다. 어쩌면 그것이 옳은 삶의 지침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예술의 벌판



끝없는 예술의 벌판에서

마음껏 귀에 봄바람 쐬고 싶다


예술의 벌판에서 자리 깔고 낮술 마시며

한잔 또 권하기도 하면서 예술을 말하고 싶다


허리 꽉 묶은 남루한 끄나풀을 풀고

예술의 벌판에서 자유가 되고 싶다


낮술 마시고 예술 마시기 좋은

더불어 시를 외우고 낭송하기 좋은 계절,

하얀 종이별로 날아오고 날아가는 계절

이 온화한 봄

예술의 벌판에서 성큼 새싹으로 자라나고 싶다


「예술의 벌판 전문 인용」



새로 태어난 온화한 봄의 한가운데, 그 예술이라는 숲의 벌판 한가운데 새싹으로 자라나고 싶다는 시인의 말이 상큼하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낮아질수록 다른 주위의 것들이 높아진다는 것은 진리다. 나를 낮추고 타인을 높이는 일은 서로 높아지는 일이다. 특히 예술이라는 벌판에서는 늘 새싹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내가 최고가 아닌, 당신이 최곱니다. 하는 겸양이 푸릇하게 마음속에서 자라나야 예술이라는 숲에서 클 수 있는 자격이 된다. 김 진 시인의 말처럼 허리 꽉 묶은 매듭이 아닌, 자유가 되고 싶은 것은 모든 예술의 벌판에서 자라는 나무들의 바램일 것이다. 허위나 형식이나 지배적인 문장에 귀속된 전위와 비 전위로 구분되지 않는 드넓은 벌판의 바람을 맞으며 이리저리 몸을 맡기는 자유는 더 큰 예술의 숲을 만드는 법이다.


시를 외운다고 돈이 되지 않는다. 예술을 거나하게 토로한다고 지식인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본 세상을 내가 본 대로 느낀 대로 자유롭게 막힘없이 이야기하고 나누고 공감하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이 어쩌면 시인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예술은 낯선 세계를 낯설지 않게 만드는 매직이다. 누가 본들, 안 본들, 누가 손가락질하든, 안 하든, 이 온화한 봄에서 새싹으로 자유롭게 흔들리는 김 진 시인이 아련하게 보일 듯 말 듯하다. 어쩌면 이것이 순수에 해당하는 적확한 말이 아닐까 싶다.


음모론

 


아무도 없는 공중화장실

세면대 거울에 붙은

구불구불한 음모가

신경 거슬리게 한다

단 한 가닥에 불편하다

어찌 저게 여기 붙어있는지


손으로 집어 떼어낼 수는 없다

휴지 같은 걸 이용하기도 꺼림칙하고

당장 방법이 없다


두 손 모아 수돗물을 받는다

뿌린다

음모에 물을 뿌린다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뿌린다

또 뿌린다


세면대 안에 빠트리면

물살을 타고 순식간에

흔적 없어질 터인데

한낱 음모 따위가 애를 먹인다

뿌린다

세차게 뿌린다


신경에 거슬려도 저런 건

모른 채 돌아서야 현명한 것 아닌가


누군지도 모를 음모의 임자를 욕한다

그러면서 계속 물을 뿌린다

이미 신경은 잔뜩 곤두서있다

포기할 수 없다

나 아니면 이런 걸 할 사람이 없다


어서 끝내야 한다

누군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이짓도 난감해진다


움직인다 음모가 움직인다

겨우 세면대 속에 몰아넣는다

콸콸 쏟아지는 물을 타고

음모는 쉽게도 사라진다


과연 이게 생산적인 짓인가 생각한다

공공의 눈을 위해 나는 음모를 제거했다

보이지 않는 선행이다

음모의 임자를 욕한다

구불구불한 자일 터


「음모론 전문 인용」


음모 陰毛와 음모 陰謀의 차이를 묘하게 섞어놓은 작품이다. 단순한 삶의 에피소드에서 발견한 음모의 실체가 생각보다 음습하다. 세면대 거울에 붙은 구불구불한 음모를 수돗물을 받아 뿌리는 시인. 물 한 바가지에 흔적조차 사라지고 말 음모인데 왜 우리는 음모에 집착하고 음모에 목매며 사는지를 되묻고 있는 시인의 시선이 공감이 간다. 현대 사회는 음모론의 사회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연일 생산되는 가짜뉴스와 딥페이크로 합성한 가짜 사람들의 진짜일지 모르는 모습, 가면 속과 가면 밖의 세상이 다른 이유에 대해 늘 고민해야 하는 우리를 문장 속에서 해학적으로 표현하는 시인의 기술적 테크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신경에 거슬려도 저런 건/ 모른 채 돌아서야 현명한 것 아닌가/ 하는 문장 속에 음모에 대한 시인의 관점이 보인다. 하지만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처사라는 것을 알기에/ 나 아니면 이런 걸 할 사람이 없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책무에 고심하고 있다. / 과연 이게 생산적인 짓인가/ 하며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적인 모습이다. 과연 내가? 과연 당신이? 과연 누가? 과연 우리가?로 확장할수록 음모는 세면대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공공의 눈이란 과연 무엇인가? 공공이라는 말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는지 곰곰 생각해 문제다. 결구가 매력적이다. 결구의 질감이 신선하다. /구불구불한 자일 터/ 곧은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생각의 구조가 구불구불하고 불투명하고 왠지 시큼한 냄새가 날 것 같은 자라는 말이다. 음모가 그렇다. 세상의 모든 음모는 구불구불하고 시큼하고 싫다. 양모가 아닌, 음모의 배후에 도사린 음모를 볼 줄 아는 혜안을 갖길 김 진 시인은 바라고 있는 듯하다.




자정 이후

많은 비가 올 거란 예보에

잠 못 들고 기다린다


비가 오길 바라는 밤

잠시간 소나기라도 내리길 바라는 밤

깊은 밤 생각이 많은 밤

어둠 속에서 수염을 긁적이는 밤


잠든 사이

세차게 때리는 빗소리에

깨어나 몸 일으키고

얼마나 깊이 잠들었을까,

빗물 때문에 그랬겠지

아직 아침이 오려면 멀었다


요란스레 떨어지는 빗물

그 많은 빗소리 가운데

두세 개만 건져도 좋으리라


비로 쓰는 세상사

빗길에 뿌린 식은 커피는 신속히

자취 없어지고

나의 허물도 그렇게 없는 셈 친다


「비 전문 인용」


비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을 생각해 본다. 비는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늦은 밤의 비는 잠 못 드는 밤을 위한 세레나데처럼 불면에 시달리게 한다. 자다 깨다 깨다 자다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다. 시인은 비로 쓰는 세상사라는 말을 한다. 비로 쓰는 세상사는 상념과 번민과 아련한 회상과 과거로 회귀하려는 나를 조망하게 마련이다. 계절마다 비의 색감이 다르다. 봄비와 여름비와 가을비와 겨울비의 색감은 계절이 주는 감각에 비례해 나름의 질감으로 나를 채색하기 마련이다. / 그 많은 빗소리 가운데/ 두세 개만 건져도 좋으리라/는 시인의 말이 필자를 빗속으로 이끈다. 아니 내가 비를 데려가는지도 모른다. 비라는 세계 속으로 잠입하면 건질 것없는 생의 시간 속에서도 무언가 건질 것이 보인다. 아니 들린다. 땅에 떨어지는 빗물을 하나둘 세다 보면 환영처럼 떠오르는 모습들, 잊힌 그리움의 갈래가 단편적인 생각의 갈래가 한줄기로 합쳐진다.


비를 기다리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정작 필요한 농사꾼이 아니라도, 도시에서 방황하는 실향민이라도,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비틀거리는 취객의 호주머니 속에도 비는 내릴 것이며 그 빗속에서 꺼낸 이야기들이 나를 오래전 잊은 나라로 데려가기 때문에 비는 알코올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빗물 때문에 잠들고 빗물 때문에 깨고 빗물 때문에 당신이 생각나고, 또 내가 생각나고, 글이 생각나고, 끄적거리다 보면 비가 생각나고, 다시 당신이 생각나고, 커피 한 잔이 생각나고 그러나 비가 멈춘 것처럼 문득, 내 커피 한 잔도 차갑게 식고, 나는 다시 나를 위로하는 위무가 되풀이되고, 점점 더 많아지는 상념과 번민 앞에서 여전히 나는 갈팡질팡하고 있을 것이다.

가볍게 쓰면서도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가진 작품에서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깨닫게 된다. 빗줄기에서 생을 발견하는 것은 쉽다. 그것을 쉽게 쓰는 것은 어렵다. 김 진 시인의 시가 그렇다. 쉽게 쓴 듯 어렵게 쓴 작품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그것이 시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특징을 잘 표현한 ‘고냥이’라는 작품을 아래 인용해 본다.


고냥이



고양이 머리에 손을 얹으니 전해지는 따뜻함,

봄볕의 기색이었다

봄은 이렇게 푸근히

고양이에게도 한 줌 볕을 선사했다

쓰다듬어달라 눈감은 미소로 머리 내미는 고양이,

쭈악 늘어지게 기지개 켜는 고양이,

푸석한 상자 더미에 벌렁 누워

볕 좀 쬐자 일어날 생각 안 하는 고양이,

고냥이는 지난겨울 엉덩이에 돋은 얼음 꼬리를 막 떼어냈나 보구나.


「고냥이 전문 인용」


어쩌면 고냥이와 김 진 시인은 동격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삼인칭 관찰자의 시선이 아닌, 일인칭 대상과 나의 혼용. 김 진 시인의 시집 **** 속 작품이 대부분 그렇다. 김 진 시인의 생명력은 문장 속에서 문장을 진솔하게 엮어나가는 것에 있다. 화려함이나 수사의 비만에 방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묘사하며 시인 자신을 즐기는 것이다. 이 가을에 더 깊은 나를 회상하고 싶다면 김 진 시인의 시집 ****를 일독해 보자. 가볍게 시간의 현을 타며 바이올린을 연주하듯 나를 연주하고 싶다면 시집에 몰두해 보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다. 맺으며


몇몇 작품으로 김 진 시인의 작품성을 모두 논할 수는 없다.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대체적인 시집 속 시의 분위기와 주제 의식, 피사체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빛을 고려해 볼 때 글의 온도가 매우 따뜻하다는 것이다. 철저한 자기 낮춤에서 비롯된 성찰적 자기반성, 회상에서 비롯된 긍정의 힘, 때론 열정적인 구도의 자세까지 일관적으로 김 진 시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말하고 싶은 대로 구성한 것 같아 읽는 내내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시는 정답이 없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시는 정답이다. 다만, 필수 요소인 진정성이 담보될 때 정답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김 진 시인의 시가 그렇다는 말이다. 깊어지는 가을의 끝자락, 겨울의 초입에서 가슴이 따뜻해지고 싶으면 김 진 시인의 시집 (빈총잡이 저격수)를 읽어야 한다. 저절로 데워질 것이다. 내 삶의 깊이다. 마지막으로 김 진 시인의 작품 한 편을 소개하고 맺는다.


예약발송



12월이 훌쩍 넘었어도 첫눈이 오지 않은 것은,

첫눈이 오면 꽃을 줘야겠다는 결심을

못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 사이 하늘은 시간을 더 주었고,

눈물 삼키듯 첫눈을 참아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만 첫눈이 오면

꽃을 줘야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해봅니다


이 글은 첫눈 오는 날 가기로 합니다.


「예약발송 전문 인용」


(글/ 김부회)


김 진 시인 프로필


전북 장수/월간 한울문학 시 등단/전북문인협회 회원/한국문인협회 장수지부 회원

표현문학 회원/한국가을문학 회원/시낭송가/재능시낭송협회 회원/현대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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