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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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운영꽃부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330회 작성일 19-10-20 09:18본문
하얀 시트 위에
팔 다리 없이 개나리꽃 물든 자국만 요란하였다.
퇴촌으로 가는 외진 길 이차로에서 사슴 한 마리를 보았다.
게시판이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유명산이라던가 명성산이라던가 아무튼 형체가 허물어지고 있는 거대한 산 곁을 지날 때였다.
죽기 직전까지 무릎을 세워
소반 위에 원고지를 놓고
병원비를 갚으려 시를 썼다는 노천명이 오늘 죽었다.
그녀의 오월을 따라
작은 길 하나에도 곁을 내 주지 않는
숲 안으로
숲 안으로
들어가노라면,
고가(古家) 한 채 숨어 있었다.
깨끗한 천으로 덮은
마룻바닥 호흡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어느 오월 밤
꽃을 따서 문 사슴이 병풍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적막한 사람들의 이야기.
불 꺼진 후박나무 가지에
수줍은 통증이 돋았다.
차갑게 뻣뻣한 발바닥이
이불 속 열기에 뜨거워질지언정,
텅 빈 혈관 안에 그리운 것들이 산수유열매 빛깔로 함께
썩어가는 늦봄의 소리.
사슴은 제 가슴을 절개해
벌어진 붉은 나무들 사이로 산의 소리를 듣고 싶었으리라.
이리저리 뒤척이던 노천명은
오월에 죽지 못하고 며칠 더 살다가
유월이 되어서야 죽었다.
퇴촌 가는 길 이차로에서 만난 사슴은
두릅순만큼만 자란 뿔 위에
이끼 돋은 소녀를 묻히고 있었다.
사슴은 먼 데 고개를 돌려
신호등을 지나가는 어떤
영원 비슷한 것과 시선을 나누고 있었다.
노천명이 죽기 전날 밤
그녀의 병실 안으로
명성산 숲이 들어갔다고 했다.
그때 노천명의 조금 벌어진
입 속에 뻗어나간
퇴촌 가는 길 이차로에는,
달빛이 사향냄새와 섞여 세모천의 물소리가
들렸을 지도 모른다.
숲 안으로
그녀의 발자국을 하나 하나 따라가다 보면,
산수유 열매 사태진
선홍빛 바람 속에 서정시처럼
고가(古家) 한 채 숨어 있었다.
댓글목록
존재유존재님의 댓글
존재유존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망자의 삶에 대한 미련과 소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마치 사진을 보듯이 눈앞에 선명합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강녕하십시요
자운영꽃부리님의 댓글의 댓글
자운영꽃부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