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바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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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계보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77회 작성일 25-01-03 06:44본문
빛 바랜 사진
노랗게 빛이 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이 30여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유품 속에서 나왔다. 노랗게 바랜 사진 속에서도 하얀 두루마기의 20대 후반쯤이나 되어 보이는 얼굴의 젊은 아버지가 거기 서 계셨다. 언뜻 보아도 지금의 내 얼굴과 바로 오버랩이 될 정도로 젊은 날의 아버지의 얼굴은 복사기로 박은 듯 나와 흡사했다. 살아생전엔 한 번도 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던 얼굴이 거기 영화처럼 웃고 계셨다.머나먼 옛날의 얼굴과 가까운 현실의 얼굴이 하나가 되어 차창의 주마등처럼 스크린이 거꾸로 감기듯 쏜살같이 옛날로 달려갔다.
리어카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오솔길을 지나면 사철 미꾸라지가 노니는 미나리깡이 맑은 물을 담고 있었고 미나리깡의 작은 둑에는 한여름 내내 푸르렀던 모시잎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쓰러져 가는 고택이 힘에 부쳐서 가르릉 대는 이끼 낀 담벼락 밑에는 연두색 돌냉이나물이 점령을 하고 백년도 넘었을 것 같은 통감나무 한 그루 옆에는 무화과 나무가 잔가지를 뻗어 담장 위를 걸터 앉았다. 닭이 모이를 쪼는 마당에 들어서면 수심에 찬 새파란 새색시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부엌에서 가난한 쌀독의 바닥을 긁고 있었다.
자손이 귀하디 귀한 고택에 8대 외동의 옥동자가 태어났다. 시아버지는 담뱃대를 물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남편은 며칠 전 아버지가 보리쌀 한 되를 바꾸어 읍내에서 사온 상한 생선을 잘못 드시고 장염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갓 시집온 열여덟의 새색시가 우왕좌왕 하며 시집살이를 헤매고 있었다, 완고한 시아버지와 시누이에 층층시하 시집의 무게에 남편까지 저러이 배를 안고 뒹굴고 있으니 박복한 자신의 미래를 에측이나 했을까. 이래 저래 시달린 시집살이가 옷고름에 때가 묻어 새까매질 때 시름시름 앓던 남편이 졸지에 세상을 떠나 버렸다. 아이가 겨우 세살이 들던 늦은 봄날이었다.
청상이 된 어머니와 아들은 그렇게 외로운 고택의 주인이 되어 일생을 살아갔다. 세살 때 홀로이 된 몸을 아들에게 태산 같이 의지하며 몸에 배인 대쪽 같은 지조로 가문을 지키는데 몸을 던지셨고 아버지가 예순 즈음이 되었을 때 한 많은 삶을 놓으셨다. 향년 80세. 손자인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던 할머니,객지에서 이따금씩이라도 내려오면 대문까지 맨발로 뛰어나오셔서 내 목을 안고 얼굴을 비비시며 눈물을 훔치시던 할머니. 9대 외동의 할머니의 사랑은 한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제껏 살아오면서 할머니가 내게 준 그런 사랑을 한 번이라도 받아 본 적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랑이 메마른 나의 가슴이 더욱 메말라 터졌다.
빛 바랜 아버지의 사진 한장에 할머니의 사랑이 거기 있었다. 빙그레 웃으시는 하얀 두루마기가 그리웠던 그 시절의 그림자가 다정한 모습으로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정든 사람은 모두 떠나고 세월만 덩그러니 창가에 앉았다. 언젠가 나도 이 자리를 아이들에게 넘겨 주겠지만 나도 먼저 가신 어른들처럼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고 간 어른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 보지만 대답은 아니다 이다. 그래도 아직 작은 온기라도 있을 때 사랑의 싹을 틔워 보려 노력하리라. 관 속에 들어 누웠을 때 미소라도 지을 수 있게 사랑의 미소로 살아가리라.
찬바람 이는 겨울 아침이다.
댓글목록
물가에아이님의 댓글
물가에아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눈물이 따뜻한 눈물이 쏟아집니다~
안타까운 눈물이 쏟아집니다~
요즘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목숨을 잃은
옛님들의 안타까움도 가슴 아픕니다~
특히 女人네들의 시집살이는
아직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 이고예~
내리사랑이 얼마나 진하고 강했을지 충분히 느껴 집니다
독자로 내려오는아들 선호는 더 했겠지예~
사랑을 표현하시기 어색한세대시지만
많이 표현하시고 만히 행복 하시길예~
계보몽님의 댓글
계보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할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먹먹하지요
새파란 청상의 몸으로 가문을 지켜냈고 금지옥엽의 아들을
문중의 중심으로 잘도 키워 내셨습니다
지난 봄 이장할 때 할머니의 유골에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듯
한참을 쓸어 안고 있었습니다
10대 11대 독자가 뒤를 이어 오고 있으니 잘 죽는 일만 남았습니다
내리 사랑의 미소로 잘 죽고 싶습니다
함께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아님!
안박사님의 댓글
안박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계보몽* 詩人`隨筆家님!!!
大宗家집의 9代獨子이신,"계보몽"任을 存敬합니다`如..
昨今의 時代에는,"種孫"이나 "獨子"의 槪念도 사라져가고..
本人도 "鄕里`種親會"의 會長을,十年간 維持하며 懷疑感이 多..
時代가 變하니,사람들의 情도 變異하고.."계보몽"任!Whitting해要!^*^
계보몽님의 댓글
계보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안박사님 말씀에 구절구절 공감을 합니다
이곳 지방은 아직도 유색이 많이 남아 있어
서로가 귀찮은 부분이 다소 있더라도 참아가며
내 아버지가 그랬으니 하고 견디는 것 같습니다
문중문화의 개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만 공허한 메아리만
맴돌고 있습니다. 종토를 지키는 행정조직이라도
만들어 놓고 사라지고 싶습니다
날씨가 시절만큼이나 우중충 합니다
늘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