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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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윤
인구부 전투* 중 사망한 순천사범학교 여학생
정기덕의 장례식에 모인 군중들이
뚝뚝 눈물을 흘린 것은
죽음은 아깝지도 슬프지도 않으나
따뜻한 밥 한 끼 못해 먹인 것이
못내 미안하고 애처롭다는
노모의 고별사 때문이었다
해방이 되었지만 고을 산천마다
지지리 먹을 것이 궁한 나라
아이들은 산에서 나무껍질 뜯고
아낙들은 술 찌꺼기라도 얻어 보려
도갓집 찾아 긴 줄 섰다 한다
밥숟가락 하나 줄이자고 동네 친구들과
어우렁더우렁 자원입대한 것도 군에 가면
밥은 굶지 않는다는 소문 탓이었다
세 차례 태풍에 장마까지 겹친 그해 가을,
여수 인민대회장에 낙엽처럼 모인 이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한 것은
사상도 이념도 아닌 밥 한 끼였다
밥 먹여주겠다는 쪽이 우리 편이요
세상의 정의였다
부역의 굴레 쓰고 평생 빨갱이
집안 낙인으로 살았던 까닭이
마을을 지나는 군인에게 건네준
주먹밥 한 덩이였다
차를 타고 전라도 어디쯤 돌다
잔치상 같은 밥상을 만나면
입이 떡 벌어진다
산의 것 들의 것 바다의 것
숨이 붙어 있는 모든 것들의
집회 같다 축제 같다
한 끼 제대로 드셔 보시라 한다
그가 체포와 구금 대상이었다
한 끼가 반란의 주동자였다
* 인구부 전투 :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과 반군 간에 벌어진 최대 격전 중 하나
-계간 『시와징후』 2025년 봄호
댓글목록
장승규님의 댓글

밥 먹여주겠다는 쪽이 우리 편이요
세상의 정의였다
그때만 그랬겠습니까?
지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무의(無疑)님의 댓글

먹고사는 문제가 정의였던 시절,
숟가락은 입으로 들어가고
정의라고 믿는 것이 정의인 시절,
입 밖으로 나온 게 숟가락인 줄 알았는데 마이크고
이시향님의 댓글

푸근한 인심이 느껴지는 밥 한번 먹자~~~요
임기정님의 댓글

그래서 그랬나요
밥 먹었냐
밥 한끼 같이 먹자고
참 가슴아픈 시이네요
귀한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