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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림 시 <물왕저수지>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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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40회 작성일 26-04-23 11:04

본문

왕 저수지 4

 

     성유림

 

 

저수지 옆 주유소에서 일하는 남자는

주유소에 산다

 

남자가 자주 꾸는 꿈은

주유소에 불이 나는 꿈

 

불이 나는 꿈을 꾸고 나면

다음 날은 꼭 비가 내렸다

 

젖은 수건으로 등을 닦으며 그는 생각했다

샤워를 마치는 순간 잊혀지는 꿈의 장면들에 대해

 

그는 밤마다 저수지 주변을 걷는다

남자는 주유소에서 머무르는 시간보다

더 오래

 

빛이 튀는

저수지를 바라본다

 

반짝이는 저수지를 배경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웃는 표정들이 젖어간다

 

나무 틈에서 튀어나온 고양이가

젖은 도로로 달려 나가고

막을 새도 없이

 

비가 쏟아진다

 

남자의 바로 앞에서

주유소가 타오른다

 

번져가는 불빛 속에서 누군가

예쁘다, 예쁘다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남자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반쯤 젖은 담배를 입에 문다

 

타오르는 것들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은 채

 

서서히

 

어두운

빛 속에서 눈을 뜬다

  

-2026 매일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백색 소음

  

 

나 너에게 머리부터 들이밀면 온몸을 다 넣을 수 있을까?

 

우리 서로의 가슴을 빨다 보면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좋았던 때로 말이야 손끝을 베고 날아가는 수천 마리의 종이학, 뚝뚝 흘러내린 바닐라 아이스크림, 부러진 문짝을 듬뿍듬뿍 입에 넣으면

 

그것들이 아주 천천히 녹아내려 우리의 목젖을 툭 건드리고 마주 보면서 구역질을 하고 위로하듯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고

 

왼쪽 엉덩이에 있는 푸른 점을 한참 동안 어루만지고 씻기고 머리 위로 미지근한 물을 뿌리고 그러다가 식물처럼 자라나는 징그러운 머리칼이 보기 싫어지면 뒤로 뒤집어 하얀 분을 두드리고 다시 젖을 물리고 서로의 발바닥을 때리고 자장자장 재우고 부러진 문짝 틈새로 죽이지 못한 울음이 끈적하게 들려오면 다시 자장자장 재우고 재우고 재우고

 

그렇게 곤히 잠들면

 

아가야

자장자장

죽음이든

잠이든

 

똑같아

 

잘 자,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분유 같은 눈이 흩날리는 밤

 

동그랗고 말랑한 우리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2026년 신춘문예 당선시집

 

 

 

 

륵샤사나

 

 

거실 구석에 놓인

올리브 나무를 본다

 

깨진 화분이

흙을 토해낸 자리에

하얀 돌이 흩어져 있다

 

쥘 수 있는 것과 쥘 수 없는 것 사이

 

팔을 들어 올리면

한 번도 손에 쥔 적 없는 올리브 냄새가

쏟아졌다

 

무게를 가진 것들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법을 배운다

 

창틈으로 미세한 바람이 드나든다

뼈와 뼈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죽은 가지는 뻗어가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젖은 깃털처럼 흔들린다

 

무릎 뒤의 그림자가 조용히 말라가고

척추가 새떼처럼 흩어진다

 

가끔은 두 발로 서는 일이

실수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화분의 가장 밑바닥처럼

한 번도 비워진 적 없는 어둠이

안쪽에서부터 자라나고

 

창밖의 나무가 불쑥 초록을 뻗는다

그늘이 떨어진다

 

둥근 화분 속

부드러움을 움켜쥐는 손

 

균형은 늘 먼 곳에 있다

 

―『2026년 신춘문예 당선시집




위밍 바이오그래피

 

 

무릎이 구부러진다

이것은 나의 의도가 아니다

 

다이빙대 위에서 발이 미끄러질 때

누군가 세상 밖으로 나를 밀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몸속에 들어 있어

몸은 물속에 들어 있어

물은 몸속에 들어 있어

 

가위가 지나가는 곳에서

물이 잘려 나가네

 

아무도 침범한 적 없는

물의 표면을 본 적 있니

 

울음처럼

올망졸망하게 모여있는

잠과 기포들의 움직임

 

둥글어지다가

부풀었다가

터져 버리는

 

알이 부화한다

 

떠올라야 한다

 

물속에서

낯선 나의 등이 지나간다

 

바이오그래피가 물에 젖는다

무릎에서 다시 무릎까지

 

굴절된 배꼽 위로

나를 손에 쥔 가위가 지나간다 

 

계간 문파문학》 2026년 봄호




Test Pattern

 

 

생일 케이크 앞에서는 왜 모두 불을 끄고 있을까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안 부르는 사람을 구분할 수도 없게그거야 초에 불을 붙여야 하잖아그렇지만 초가 주인공은 아니잖아그래도 그 앞에서 소원을 빌어야 하잖아맞아사실은 나도 그 순간을 좋아하는 사람케이크 위에 꽂혀 있는 초의 개수가 늘어갈수록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빙글빙글 초의 몸통을 타고,

 

흘러내리는 빛 아래로물렁한 파도가 친다빛에 떠밀리는 사람들나는 그늘을 찾아 계속해서 걷는다걷을 때마다 한 칸씩 그늘이 접혀간다희고 구불구불한 빛이 내 목덜미를 감는다담장 뒤쪽에 놓인 해바라기들은 미친 듯이 고개를 뻗고 있다해를 향해천천히 그을리는 감각빛이 통과한 흔적나는 배꼽 안에서부터 벗겨진다빛은 물처럼 출렁이고 태반처럼 빠져나간다노래와 함께 촛불이 꺼진다.

 

송출 종료.

 

 ― 《계간문예2026년 봄호




 

1999년 경기도 출생

2026 매일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


[2026 매일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소감 

 

저는 가끔 밥을 먹는 일이, 버스를 타는 일이, 공원을 걷는 일이, 잠을 자는 일이 미안하게 느껴집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가 끝까지 무사히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이, 어딘가에 남겨진 몫을 몰래 가져온 것처럼 마음에 걸립니다.

 

오랜만에 꺼내 본 일기장 속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은 '미안하다'는 사과였습니다. 이 사과가 용서를 바라서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살아 있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 시를 쓰는 일은 사과를 가장 느린 속도로, 조심스럽게 반복하는 일입니다. 쉽게 면죄부를 얻지 않기 위해서요.

 

어렸을 땐, 말을 잘하는 사람만이 시인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를 쓰는 사람이 된 지금의 저는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걸음마를 처음 뗀 아기처럼, 어떤 말이 괜찮은지 오래도록 머뭇거립니다.

 

모두가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 버린 일들도 계속해서 곱씹는 저는, 도무지 빨라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느리더라도 꾹꾹 눌러쓰고 싶습니다. 무엇도 함부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말을 내뱉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 부족한 제 시를 읽어주시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선생님들, 교수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시를 쓰는 제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가족들도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무엇보다 나의 분신과도 같은 엄마와 늘 내 편이 되어주는 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성유림 약력

 

-1999년 경기도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재학중

-2026 매일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26 매일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

 

  시간은 무심히 지나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 묶인 것처럼 목줄에 당겨져 앞발을 치켜들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의 목을 조이는 그 순간 속에 시가 있다. 그때는 분명 현재지만 어쩌면 과거와 미래가 한꺼번에 체감되는 몸의 시간일 것이다. 달려온 시간과 달려갈 시간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속도계 같은 것. 그 불가능한 계측의 눈금이 바로 시일 것이다. 예년보다 늘어난 응모작들이 하나같이 일상의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고투를 선보였기에 꺼낸 말이다. 역사나 담론 혹은 차이와 차별에 대한 윤리적 감수성을 내세운 시편들보다 파도처럼 넘어오는 하루하루의 정념들에 바쳐진 시는 그래서 매번 인생의 극점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좋은 작품이 많았고 때문에 논의가 길었다. 김태훈의 '자습'이 세계와 화자의 만남을 곡진하면서도 눈부시게 그려냈다면, 김도열의 '얼음의 문법'은 단단한 정념으로 세계를 포착하는 힘이 느껴졌다. 다만 그 수려함 때문에 세계에 대한 응전이 짚이지 않다는 점이 아쉬웠다. '역할놀이' 등을 보낸 나은이는 경쾌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세계의 비의를 놓치지 않는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김다은의 '시력표'는 노련한 시선을 통해 세계의 침범을 구체적 형상으로 그려낼 줄 아는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겨루었지만 자신의 언어에 대한 확신이 더 필요해 보였다.

  

  성유림의 '물왕저수지'는 잔잔한 저수지와 불타는 주유소를 꿈과 현실의 교차 속에 보여준다. 그런 평온과 재난은 내면의 일이지만 또한 세계의 일기도 해서 우리는 물길과 불길 사이에서 기이한 불안을 함께 겪을 수밖에 없다. 마침내 삶의 모든 순간들이 휘발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다다른 뒤에야 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함께 보내온 '쏟아지고 있었다'가 보여준 날카로운 도약이 단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안전한 짜임새에 대한 우려를 상당 부분 상쇄한다는 점도 미래에 대한 믿음을 두텁게 하였다. 심사자들은 예외 없이 성유림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하였으며 다른 이들의 시 역시 곧 지면에서 보게 되리라 예측했다.

 

심사위원 : 정끝별, 장석남, 조용미, 신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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