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문장 / 김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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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문장
김 근
멀리서 꽃 졌다는 소식이 오고 네 얼굴 지워질 것 같은 기분으로, 미처 가보지 못한 곳에서
꽃들 만개했다. 져버리고 빛깔도 이름도 끝내 알지 못하겠는데 멀리서 흐려진 마음이 오고
네게 얼굴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만 지워질 것 같은 기분으로, 바람 불고 멀리서 비 몰아오고
얼굴이라는 말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네가 내 쪽으로 돌아누울 것만 같은 기분으로, 이제
너를 어떻게 알아보나 얼굴도 없이 너는 나를 어떻게 알아보나 우리가 아는 사이인가요
물으면 모르는 사이가 비로소 생겨나고 너는 너라는 지칭도 잃고 아득해만 져버릴 것 같은데
그제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으로, 와락 껴안고 쓰다듬고 키스를 그러나
키스할 얼굴을 끝내 찾지 못하고 내 얼굴도 그만 지워지고 말 것 같은, 모르는, 얼굴 없는
내가, 모르는, 얼굴 없는 내가, 모르는 너의 볼모가 될 것 같은, 그러다 내쳐지고 그러다 패대기
쳐지고 그러다 매달리고 울고불고할 것 같은 기분으로, 내가 도무지 남아나질 않아도 이 생면
부지의 닿을 수 없는 시간의 진창에서 발이 빠지면 도무지 한 발짝도 그쪽으로는 내디딜 수 없는
자세로 이런 막다른 슬픔이 어떤 슬픔인지도 오직 모른 채 너에게 가야 한다는 가서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만 남아 허우적거리며 생면부지 이전과 이후의 아득한 경계에서 못 알아본 너를
어쩐지는 알아본 적이 있었을 것만 같다는 가려운 기분으로, 아무리 긁어도 긁어도 긁힌 자국에
피가 배어나와도 가려움 좀처럼은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으로, 우리가 아는 몸인가요 물으면
몸만으로 멀리서 꽃 졌다는 소식이 오고 난데없는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은 기분으로,
―김근 시집, 『에게서 에게로』 (문학동네, 2024)

1973년 전북 고창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 등단
시집으로 『뱀소년의 외출』 『에게서 에게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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