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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계자 시인 <못의 용도>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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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99회 작성일 26-02-25 09:46

본문

의 용도 외 4편

 

     유계자

 

 

푸른 소나무는 하늘이 박아놓은 못

산이 무너지지 말라고

푸른 못으로 고정해 놓은 것

 

사람들이 길을 낸다고 푸른 못들을 뽑아내자

그 틈새로 들어온 물이 산을 벽지처럼 찢는다

계절을 장식해 놓았던

층층나무며 팥배나무 뿌리가 산 아래까지 엎질러졌다

 

풀뿌리 같은 틈을 내주고

황토 같은 절망이 밀려들어 신뢰가 찢어지기도 했다

저녁나절 들려오는 딱따구리의 못질은

땅과 허공을 이어붙이던 바느질 같은 것이어서

못 이기는 척 마음을 꿰매기도 했었다

 

햇살 좋은 날

하늘은 헐렁한 구름 의자 하나 내어놓고 틈새에 못을 박는다

촘촘히 박아놓은 못들이 출렁거린다

 

가끔은 못을 박다 구부러지는 것들도 있다

양지바른 무덤 옆에 등이 굽은 소나무

굽었다고 함부로 뽑지도 않는다

저기 공원에 한 무더기 사람들이 간다

온통 구부러진 못들이다

 

 

 

 

푸른 적막


  

몇 섬의 적막을 부려놓은 푸른색 칠이 벗겨진

철제 대문 안에 수상한 그림자들이 들락거렸다

달이 뜨는 날이면 분내가 진동하고

마당에서 굴뚝까지 조붓한 것들이 흘러 다녔다

반달무늬 문고리는 장단을 맞추고

시렁에 올려놓은 가재도구들은 어깨가 들썩

장독대마다 들여놓은 이끼는

곧 꽃의 일가를 새로 이룰 기세다

노동을 벗어놓은 장화는 마루 밑에서 수년째 몸을 쉬는데

예고 없이 들이닥친 한 사람을 보고

메꽃이 아침부터 불어대던 나팔을 떨어뜨린다

눈치 빠른 것들은 서둘러 대문을 빠져나가고

밤새 비틀거리던 달맞이꽃 바랭이 개망초

칡넝쿨까지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잘 차려입은 나비들도 선머슴 같은 호박벌도 줄행랑이다

발소리에 납작 엎드려 발발 떠는 것들

예초기를 메고 스위치를 넣자

금세 흙이 튀고 풀의 냄새가 잘려 나간다

새소리까지 베어지고 나서야

텅 빈 아궁이만 느린 하품을 다물지 못한다

대문 앞 산목련 한 그루가 걸어놓은 조등은 꺼진 지 오래

빈 마당을 내려다보는 늙은 감나무

부러진 가지에 멧비둘기 걸터앉아

구국 꾹꾹 이 집의 내력을 쪼아대고 있었다

 

 

 

 

달력을 바꿔 거는 동안

 


벚나무는 자꾸 꽃잎을 흘리는데

빈 그네에 노을이 앉아요

나를 안고 그네를 타던 엄마의 붉은 구두는

놀이터를 벗어나 어디를 걷고 있을까요

주방에서 쌀국수 삶는 냄새가 사라지고

날마다 할머니의 잔소리가 밥상 위에 쏟아져요

티브이에서 탁란하는 뻐꾸기를 보고

저런 저런 못된 것 같으니라고

못된 짐승이 또 있네

어쩔 수 없이 나는 짐승의 아이

할머니는 짐승의 아이마저 사라질까 봐

나보다 먼저 울어요

동전처럼 머리털이 빠져나가고

날짜의 각질들만 말라가는데

붉은 모랫바닥에 타갈로그어로 쓴 내 생일

초대할 친구 없어 고양이만 그려요

놀이터에 오는 줄무늬 어린 고양이

내 울음에 자주 끼어들어요

우린 풀린 꽃잎처럼 오래도록 어깨를 들썩이죠

폰 속에서 이모티콘 생일축하 촛불은 타고 있는데

엄마는 줄이 없는 꽃잎, 어디까지 날아갔을까요

 



물마중

 


 

그녀의 굽은 등에 파도가 친다

오롯이 숨의 깊이를 다녀온 그녀에게

둥근 테왁 하나가 발 디딜 곳이다

슬픔의 중력이 고여 있는

물의 그늘 속에 성게처럼 촘촘히 박힌 가시

물옷 속으로 파고드는 한기엔 딸의 물숨이 묻어있다

 

끈덕진 물의 올가미

물숨을 빠져나온 숨비소리가 휘어진 수평선을 편다

바다의 살점을 떼어 망사리에 메고

시든 해초 같은 몸으로 갯바위를 오를 때

환하게 손 흔들어 물마중 해주던 딸,

 

몇 번이고 짐을 쌌다가

눈 뜨면 골갱이랑 빗창을 챙겨 습관처럼 물옷을 입었다

 

납덩이를 달고 파도 밑으로 들어간 늙은 어미가

바다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테왁 같은 낡은 집이 대신 손을 잡는다

 

저녁해가 바닷속으로 자맥질하고 있다  

 


 

 

어머니를 대출합니다

 

 

겉표지가 낡아 덜렁거린다

풀로 붙이고 표지를 싸매고 첫 장을 열었다

훅 풍겨오는 곰팡내 책 비듬이 떨어진다

까실까실한 글자들로 들어차

손끝이 찔려 바로 돌려줄까 고민하다

이왕 빌렸으니 꼼꼼히 읽기로 했다

한쪽이 허물어져 침을 묻혀도 잘 넘어가지 않는다

이미 서슬 퍼런 문장들은 녹이 슬고

고단한 제목들도 코 고는 사족이다

빛나던 경칩의 장식은 떨어져 나가고

꼭지를 놓친 복숭아처럼 물러져 있다

침대맡에서 책을 읽다가

힘이 빠진 저녁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수십 년 버무려진 이야기를 한 달에 끝낼 수 없어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았더니

도서 대출 칸에

둘째 동서가 기록되었다

  

 유계자 시집, 물마중』 (지혜, 2023) 외




 

충남 홍성 출생

2016애지신인상 등단

시집 오래오래오래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  물마중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2년 중소출판사 출판콘텐츠 선정

웅진문학상, 애지문학작품상, 평사리문학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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