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규 시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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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외 2편
김충규
어두운 낮빛으로 바라보면 물의 빛도 어두워 보였다
물고기들이 연신 지느러미를 흔들어대는 것은
어둠에 물들기를 거부하는 몸짓이 아닐까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에 취하지 않는 물고기들,
그들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몰골은 어떻게 보일까
무작정 소나기 떼가 왔다
온몸이 부드러운 볼펜심 같은 소나기가
물 위에 써대는 문장을 물고기들이 읽고 있었다
이해한다는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그들의 교감을 나는 어떤 문장으로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살면서 얻은 작은 고통들을 과장하는 동안
내 내부의 강은 점점 수위가 낮아져 바닥을 드러낼 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풍성하던 魚族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 후로 내 문장엔 물기가 사라졌다
물을 찾아온다고 물기가 절로 오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물이 잔뜩 오른 나무들이 그 물기를 싱싱한 잎으로
표현하며 물 위에 드리우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분명 나를 부끄럽게 했다
물을 찾아와 내 몸이 조금이나마 순해지면
내 문장에도 차츰 물기가 오르지 않을까
차츰 환해지지 않을까
내 몸의 군데군데 비늘 떨어져나간 자리
욱신거렸다
이 몸으로는 저 물속에 들어가 헤엄칠 수 없다
모르는 게 분명해
저녁이 점점 오고
꺼멓게 숯이 된 새들이 숲 쪽으로 비틀비틀 사라지고
서녘이, 지나가는 새들의 목을 쳐서 그 피를 내어 먹는다
그렇게 허기를 견디는 서녘이다
그 피를 얻어 마시려고 숲의 나무들이 더 꼿꼿하게 서서 아우성이다
서녘이 부어주는 피를 나무들이 게걸스럽게 받아먹는다
일몰의 맛을 끊지 못하고 중독된 나무들 틈에서
어떤 나무는 오히려 피를 거부하여 점점 말라간다
저녁이 오면 피가 모자라서 어떤 나무는 늑대처럼 울부짖는다
서녘의 일몰을 쳐다보며 저런 황홀함에 취해
어진 나무들이 서로 손잡고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 곁에 선 당신은 아무 망설임 없이 말했으나
나무들끼리 서로 할퀴고 뜯어 상처 욱신거려
저녁의 숲이 얼마나 살벌한 줄 모르는 게 분명해
목이 달아난 새들이 방향을 잃고 어지럽게 숲을 떠돌며
슬프게 우짖는 소리가 사방으로 핏물처럼 번지는 줄
땅에 떨어진 새대가리 쪽으로 벌레들이 스멀스멀
몰려들고 있는 줄 모르는 게 분명해
붕대를 칭칭 감은 나무들이 제 숲을 버리고 다른 숲으로
야반도주하는 줄 모르는 게 분명해
눈망울이 새처럼 맑아서 당신도 일몰 무렵의 서녘을 지나간다면
뎅강,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데
서녘이 얼마나 피에 굶주린 망나니인지 모르는 게 분명해
목 달아난 새를 가족으로 둔 새들이 아침이 되기도 전에 숲을 뛰쳐나와
눈망울에 실핏줄 툭툭 불거진 채 허공을 질주하는 줄
모르는 게 분명해
그럴 때 그럴 때
수척한 밤하늘의 살에 박혀 있는
조금은 물컹한 별의 빛이 흐느끼듯 흔들릴 때
바람 아닌 것이 바람처럼 그것을 스쳐 지나갈 때
왜 먼 곳에 이르고 싶은지
그 먼 곳에서 아득해지고 싶은지
때로 머리칼을 곤두서게 하는 생의 날카로운 순간이 있어
그 순간이 칼이 되어 가슴을 벨 때
왜 빛이 되어 소스라치듯 사방에 나부끼고 싶은지
보듬어야 할 기억과 내쳐야 할 기억
사이에서
허수아비같이 허허로워질 때
마른 입술을 깨물고 싶어질 때
내 속의 웅덩이를 흔드는 어떤 노래를 듣지 않고는
견디기가 수월치 않을 때
긴장하면 왜 아랫배가 쓰라려오는 것일까
쓰르라미가 그 속에서 울음 가닥 울울 풀어놓는 것일까
그럴 때 그럴 때
내 손으로 내 몸을 더듬어서
나를 확인해야 하는,
―김충규 시집, 『아무 망설임 없이』(문학의전당, 2010)

1998년 《 문학동네》 문예공모 시 당선
시집 『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물 위에 찍힌 발자국 』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아무 망설임 없이』
유고시집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오월문학상,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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