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숲 시 <얼음꽃>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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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꽃 외 4편
박 숲
당신을 영구동토 깊은 곳에 묻고 싶어요
말들이 썩지 않도록 표정을 얼려두고
입술의 온기를 꺼둔 채
해동은 끝내 시도하지 않을래요
다람쥐가 묻어둔 씨앗이
시베리아에서 삼만 년 뒤
깨어났다는 얘길 들었어요
얼음 깊은 곳에 담긴 눈물은
썩지도 숨 쉬지도 않은 채
단단한 잠으로 버텼겠지요
병실 복도 끝
휠체어를 밀고 나오던 당신은
너무 희고 고요해서
실레네 스테노필라가 막 눈을 뜬 것 같았어요
손끝이 스치면 금이 갈 것 같아
나는 숨을 죽였죠
하지만 기억은 자꾸 체온을 되찾아
다른 얼굴로 번져요
상온에 놓인 유리잔처럼 물기가 맺히고
형태가 흐려집니다
당신이 떠난 빈집에 앉아 있으면
가구들이 라플란드 바람 속처럼 숨을 쉬어요
당신의 어깨처럼 움푹 꺼진
침대는 알래스카 서리 속에 잠겨 있고
나는 몸을 둥글게 말아 체취 속을 파고듭니다
보이지 않는 팔이 나를 씨앗처럼 감싸 안지요
얼어 있는 것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닿는 속도가 느린 거라죠
얼음 속에서 핀 꽃은 투명한 눈물을 닮았을까요
나는 끝내 꽃을 보지 못하더라도
녹지 않는 물음 하나를 골라
가슴 깊은 동토층에 묻어둘래요
언젠가 우리는 누군가의 입김 속에서
하얗게 맺혔다 사라지겠지만
숨에 닿을 때마다 당신의 이름이
얼음꽃처럼 피어나기를
<시인수첩, 2026봄호>
퍼스트 펭귄
주머니 속 핫팩이 식어갈 무렵
내 몸 어딘가
로스 해협의 바람이 지나갔다
빙판 위로 다가가지 못한 발끝
얼어붙은 정적이 서서히 깨어났다
파도 대신 떠밀린 발자국들
가장자리에선 조금씩 머뭇거렸다
누군가는 알을 품고
누군가는 얼음을 파고
대열은 조금씩 움직였지만
순서를 말하긴 어려웠다
그날은 물길이 저절로 열렸다지
빙붕 아래 해류가 떠다니고
깊은 바닷속 또 다른 계절이 흘렀다
외침보다 먼저였던 허들링
한 마리가 몸을 기울이면
다른 몸이 안으로 들어가는 반복
깃으로 떨림을 감싸고
체온이 어깨에서 어깨로 옮겨붙었다
바다 속에도 바람이 분다며?
소문처럼 스며드는 속삭임
흔들린 발끝이
눈 위에 자국을 남겼고
물살처럼 발자국들이 흘러갔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항상 누군가는 먼저 움직였고
말해지지 않은 울음
앞선 발자국 위에 길을 남겼다
<웹진 시산맥 2025여름호>
심장에 싹이 나서 그래요
뿌리를 뽑히는 순간 벗겨지는 기분, 어두운 상자에 담겨 있다 보면 숨이 차올라 발끝부터 멍이 드는 감자, 몸싸움은 포기할래요 숨을 참다 보면 싹이 심장을 뚫고 나옵니다 한 친구는 그걸 조용한 용기라 말해요
엄마는 독을 품은 감자는 먹어선 안 된대요 버려진 감자가 안쓰러워 화분에 묻어 주었죠 숨쉬기 위해 몸부림치는 건 잘못이 아니잖아요, 상자 뚜껑 틈새로 한 줄 햇살 지나면 웅크린 싹이 부풀어 올라요
작고 못생기고 눈치 없던 아이, 등이 찔리고 발톱이 부러져도 숨만 몰아쉬던 아이,
웅덩이에 처박혀도 썩지 않고 끈적하게 살아 있어요
뭔가 되고 싶었지만 그게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빛을 들키면 은빛 더듬이의 작은 벌레 몰려와 살결을 파먹었고
껍질이 터지기 전 누군가는 날카롭게 도려냈죠
싹이란 바깥을 향한 부스러진 문장이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아요
책상 모서리에 부딪힌 감정이 펄럭이고 손가락이 발톱 끝에서 꿈틀거려요
버려지면 먹히지 않을지도 몰라요
곧은 길로 나서면 너무 환해 몸이 반으로 갈라지기도 합니다
빛 한 조각이 밀어낸 투명한 숨결은 왜 모른 척합니까
너는 못난 감자야, 나는 못난 감자 아니야!
누구도 나를 버렸다고 말하지 않지만
누구도 나를 꺼내주지 않았지
이보세요 제발,
푸른 싹을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되나요
<모던포엠 2025 7월호>
아침 달
조금씩 깎이는 중입니다
스파클링 기포처럼 웃음이 헤펐던,
돌아오는 길목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죠
두고 온 밤이 신경 쓰여
하얗게 질린 얼굴
떨어지지 않는 발길 더듬으며
자꾸만 뒤돌아보네요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
어디서 흘려버린 건지
그게 눈물은 아니라 말하고 싶나요
셔츠 끝에 스며든 말의 자국
입가에 남은 쓴맛
사라진 손의 흔적 떠올리며
반대편으로 뒷걸음치면
밤새 쏟아낸 빛은 낭비하는 셈이 되나요
횡단보도 위 멈춰 선 기억들이
깨진 컵과 뭉개진 조각 케이크 위로
슬그머니 정체를 드러냅니다
실수에도 용량이 있나요
달은 어쩌다 밤의 절반을 잃어버린 걸까요
겨울로 가는 걸음 초조해져
계단마다 발목이 시리고
자꾸만 반쪽씩 사라지는 얼굴들
밤이 건넨 아침이 실수였다 말하지 말아요
누구든 실수를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 실수는 거절을 향해요
우리의 밤과 악몽은 닮은 꼴이고
누구의 것도 아닌 서늘한 기억
울퉁불퉁
서로의 언덕을 넘어갑니다
<웹진님Nim 2025 9월호>
그런 이름들
강사는 시니어 모델을 일본식 이름으로 소개했다 친절하게도 케이코, 에이코, 미코, 준코— 변형된 억양 속 낯선 이름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흔들리는 무릎과 발목들 미세하게도,
K-문화 체험 중인 일본인 손님의 과장된 탄성 센터의 포즈는 당당했지만 이름이 불리는 순간, 비슷한 색깔의 목소리들이 과자봉지 구기는 소리로 웃었다 꽃등을 둥글게 펼치고 휘어진 줄기를 세워요 오도독 가라앉는 비명 런웨이 동선이 엉킬 때마다 낡은 벽지처럼 묵은 기억들이 하품을 했다
이곳 여자들 이름은 왜 비슷합니까
말굽 소리의 가보시 힐이 거울 속으로 과거를 몰아갔고, 거울을 빠져나올 땐 맑은 날 펼치는 장우산처럼 생뚱맞은 표정을 지었다 꽃으로 불리길 원했지 자라다 만 나무들의 휘어진 나이테 이름이 정체성이라면 촌스러운 감정은 대물림의 속성
그런 이름이었죠 한때는,
흔했어요
케이코가 된 경자가 인중의 치마주름을 펼치자 결마다 오래된 이야기가 서로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이름에도 시간의 흔적을 새겼던 때가 있었다는 걸 어떻게 통역할지, 쓸데없이 내 입술은 떨렸고 촌스러운 껍질을 매듭지려는 경자의 비틀린 표정은 일본인 손님의 옷깃 아래 부서졌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 흉터에도 미세한 빛이 숨어 있어 표면 속 잘려 나간 흔적 따윈 누구도 관심 없을 테죠 우아한 스카프 틈새로 숨찬 날갯짓 고장 난 컨베이어처럼 느릿한 턴!
거울 속 이름이 거울 밖 이름을 향해 걸어나왔다
오래 익어 뭉그러진 무처럼 종아리가 차례로 흘러내렸다
멸종위기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 비슷한 이름끼리 비슷하지 않은 얼굴을 입고 웅크린 포즈, 원래의 이름이 낯선 단추로 채워지고 멈추지 않고 자라는 흰머리카락처럼 어떤 유산은 척추 깊이 새긴 이름과 함께 소멸하지
경쾌한 배경음이 무대 위로 엉성하게 퍼지다 파동으로 튕겨 나오고
흔했던, 한때의 이름들이
순진무구한 호기심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상상인 2025봄호>

2021년 《전남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2023년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시와산문》 시 당선
소설집 『굿바이, 라 메탈』, 장편소설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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