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택 시 <시간의 동공>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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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소월시 문학상 대상 수상작]
시간의 동공 외 4편
박주택
이제 남은 것들은 자신으로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만 바다를 그리워한다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말 한 마리
아주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들이 그 위를 비추면
창백한 호흡을 멈춘 새들만이 나뭇가지에서 날개를 쉰다
꽃들이 어둠을 물리칠 때 스스럼없는
파도만이 욱신거림을 넘어간다
만리포 혹은 더 많은 높이에서 자신의 곡조를 힘없이
받아들이는 발자국, 가는 핏줄 속으로 잦아드는
금잔화, 생이 길쭉길쭉하게 자라 있어
언제든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의 동공들
때때로 우리들은 자신 안에 너무 많은 자신을 가두고
북적거리고 있는 자신 때문에 잠이 휘다니,
기억의 풍금 소리도 얇은 무늬의 떫은 목청도
저문 잔등에 서리는 소금기에 낯이 뜨겁다니,
갈기털을 휘날리며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말 한 마리
꽃들이 허리에서 긴 혁대를 끌러 바람의 등을 후려칠 때
그 숨결에 일어서는 자정의 달
곧이어 어디선가 제집을 찾아가는 개 한 마리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을 토하며
어슬렁어슬렁 떫은 잠 속을 걸어 들어간다
배들의 정원
가자고 한다, 밤바다에
낮게 떠 있는 저 별, 마음 밖의
뻘밭에 빛을 비추다 쉭쉭거리는 폭죽에
마른 뺨을 부빈다, 방금 건너편에서
질러온 사람의 목소리 하나
사람의 목에 걸려 파도처럼 부서질 때
폭죽은 자신의 생애가 밤에 있음을 알린 뒤
어둠에 투항한다, 그러면 별은
비로소 자신의 빛이 회복됨에
더 높이 떠오르려 하고 배들은
파란波瀾에 슬쩍슬쩍 뒤척인다
물결이 바다를 이루고
모래가 하늘과 구분되는 동안
사람은 사람 안으로 기어드는
틈을 열어 침묵이 용서가 되는
순간을 알린다, 그리고 가자고
별들이 무늬를 만들 때
가자고, 침묵은 철썩대는 저
파도에 이정표를 세운다
명태
돌을 물에 던지자 풍덩, 하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마음에 연못이 있다는 소리
나무의 수많은 잎사귀들이 팽팽하게 부풀어 있을 때
그것은 마음의 어떤 곳을 꽃밭으로 바꾸는 일
제주 공항, 검은 옷을 입은 사내와 여자가 보따리를 들고
대합실을 빠져나가고 있다 반바지와 선글라스의
왁자한 틈 사이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보따리 틈에서 삐죽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명태
사내와 여자는 둥글게 말려오는 더운 땀을 닦아낸다
이윽고 바람이 서식지를 잃은 듯 주름을 늘이며 다가올 때
그 뒷모습을 보며 망막을 다치는 일은
풍겨 오르는 죽음의 냄새를 맡는 일
혹은 여행의 기분을 검은 옷과 바꾸는 일
애써 마음의 어떤 곳에 파도를 세우는 동안
반바지와 선글라스들이 버스에 오르고
사내와 여자가 들뜬 틈 사이로 스며들자
나무의 수많은 잎사귀들이 팔랑거렸다
밤배
횟집 처마 아래 비는 내리고
어둠 속 숨은 풍경 속으로 저녁 불 흘러내리고
떠도는 말의 무늬들은 김 서린 수족관에 엣된 글을 새기고
배는 떠가고 꽃이 피려나, 여관旅館과 그 옆의 주점酒店은
온순해지고 항구港口는 비를 받아들이며 출렁거린다
바람이 침묵에 저를 가둘 때
반은 검고 반은 흰 저! 새들
불현듯 몸 안은 고적孤寂을 배후로
봄꽃이 도지고 먼 바다에서 휘어져 오는 불빛은
아직 어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멀리 떠가는 배에 생애의 흔적이 가물거리는 밤
비에 젖은 꽃잎이
자신과 나누는 발자국을 위해 가늘게 길을 비춘다
저녁 눈
저녁은 저렇게 쉬이 온다 이 저녁이 다하면
눈길에 서서 흔적 없는 옛 자취에
과거를 불러내기도 하리라 그때 사람들은 얼음의 뿌리가
두려워 그리운 이름을 불러도 보는 것
후회를 곱씹으며 미어져오는 가슴을 뒤척여도 보는 것
눈 위에 서리라 휘황한 간판들이 눈을 받아들이고
바람이 숨 가쁘게 스칠 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 무연한 전갈들은 비로소 혼자임을 깨닫게 하리라
눈 내리는 서울 또는 바람 부는 주유소 지붕 위로
눈이 쏠리면 시간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침묵의 저편에 닿아 귀를 여는 사람들
저녁이 연신 평화를 불러대고 팔이 닿지 않는 세상이
얼음 위에 부르튼 이름을 새길 때
―『소월시 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05)

충남 서산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꿈의 이동건축』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사막의 별 아래에서』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시간의 동공』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 등
시선집 『감촉』
연구서 『낙원회복의 꿈과 민족정서의 복원』 『반성과 성찰』 『현대시의 사유 구조』
제10회 편운문학상 평론부문, 제17회 경희문학상, 제5회 현대시작품상,
제20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제5회 이형기문학상, 제46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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