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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숙 시 <따뜻한 종이컵>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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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1회 작성일 26-05-01 10:18

본문

뜻한 종이컵 4

 

      강문숙

 

 

종이컵이 따뜻하다.

공원 한 귀퉁이에 허름한 중년처럼

앉아 있는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 마시다가, 문득

객쩍은 생각을 해본다.

 

짚둥우리 속에서 막 꺼낸 달걀은

암탉의 항문으로 나온 게 안 믿어질 만큼

희고 따뜻하다, 매끈하다.

 

혓바닥 아래 고인 침처럼 상긋하게

피어난 옥잠화의 흰 살결.

벌의 항문을 거쳐서 피어난 꽃들,

그 향기도 대저 항문의 그것이니

 

쿰쿰한 엄마를 열고 나온

신생의 애물단지들아.

희고 아름다운, 향기롭고

따뜻한 것들의 떠나온 문은 하나다.

종이컵을 내려놓고, 슬쩍

만져본다

  

 

 

고등어를 추모함

 

 

고등어를 칼로 내리친다.

파르르, 결의 떨림이 칼자루를 지나

온몸으로 퍼진다. 아침 햇살이

팽팽해지는 공기를 뚫고

푸른 등 위에 내리꽂힌다.

순간, 내 속에 살의가 번뜩인다.

저만치 떨어져나간 고등어 대가리

무얼 저리도 골똘히 생각하나.

비린내를 없애려고

청주 한 숟가락 뿌리다가

얼른 목구멍으로 한잔 털어넣는다.

밤새 내게서 나던 냄새도 만만찮았지.

끓는 냄비 속으로 몸을 던진다.

뜨거울수록 고등어는 단단해진다.

 

찌개 냄비를 가운데 놓고

밥상 앞에 둘러앉아, 후후 불며

자꾸만 절하는 저 붉은 입들.

 

 

 

그 집을 엿보다

 

 

  흙을 한 입 베어 물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한 삽과 곡괭이, 뒤뚱거리던 몸통으로부터 이탈된 지 오래 되었을 빛바랜 토종닭의 깃털이 평생 하늘 한 번 날아보지도 못하고 처박혀 있는 수돗가에, 홀로 씨방을 터뜨리며 해마다 물봉숭아는 피어 주인 없는 손톱을 물어뜯는다.

 

  —게 누구요? 떠나면서도 꼭꼭 닫아 여민 부엌문, 방문들이 문고리를 달그락거리며 잠시 수런거린다. 반도 넘게 풀밭으로 변해 버린 뜨락에 게으르게 웅크리고 있던 적막이 부스스 일어난다. 청량산으로 가던 바람이 삭은 빨랫줄에 걸려 넘어져, 이리저리 뒹굴다가 황망히 사라진다.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옹기 속에 일가를 이룬 약쑥들 다 부룩하다. 곧 이 빈집이 채워지겠구나 중얼거리며 뒤란을 돌아가는데, 어라! 여기 누가 콩 자루 터뜨렸나, 반들반들 까만 염소 똥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저 앞 산등성이 쪽으로 빠끔히 열려 있는 문, 빈 염소막은 아직도 따스하다.

버려진 것들로 푸르디푸른 그 집.

 

 

 

쇠똥구리

 

 

  누군가 이 세상의 징검다리를 건널 때

  물살이 그의 발목을 적시지 않게, 엎드려

  한 개의 돌멩이가 되어주는 것.

  어린 여공의 피맺힌 손가락을 아물게 하기 위해

  내가 그 현장에서 두 팔을 내어주는 것.

  아무나 할 수 없는 눈물 나는 일.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쇠똥을 굴리며 가던 쇠똥구리 한 마리, 웅덩이 근처에서 나무 깍지에 걸려 넘어졌다. 일어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버둥거리다가, 개미가 제 등을 밟고 웅덩이를 다 건널 때까지 꼼짝 않고 엎드려 있다. 우주가 잠시, 숨을 멈춘다.



 

 근 날의 기억

 

 

  둥근 저녁이 왔다.

  길이 지워지고앙상한 겨울나무들

  잔가지 활짝 펼치고 시린 하늘 버팅기다가

  스며드는 어둠 온몸으로 껴안는다.

 

  둥근 회양목이 있는 아버지 마당에도 저녁 안개처럼 어둠이 번지겠다없는 것이 많아 더 잘 보이던 시절일곱 개의 오목한 숟가락 가지런한 저녁 밥상 앞에 고만고만한 머리통들 자꾸만 생각난다고그 때가 좋았다고 절반도 더 남은 밥그릇 슬몃 물리시겠다이었다끊었다근심 같은 육십 년 떫은 담배에 불 댕기시며 괜한 걱정 한 말씀 없으시겠다내일은 눈이 오실라나.

 

  나무들마저 지워진 유리창 밖

  허공에 동그란 불빛 걸릴 때,

  안 보이는 눈빛 하나따스하게

  내 안에 떠 있다.

 

강문숙 시집따뜻한 종이컵』 (문학세계사, 2009)

 



 

경북 안동 출생
1991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93년 
작가세계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잠그는 것들의 방향은?』 『탁자 위의 사막』
『따뜻한 종이컵』 
나비참을 수 없이 무거운』  『신비한 저녁이 오다

오페라 대본 배비장전』 『광염소나타』 『무녀도』 『유랑』 『독도환상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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