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금진 시 <웃는 사람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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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사람들 외 4편
최금진
웃음은 활력 넘치는 사람들 속에 장치되어 있다가
폭발물처럼 불시에 터진다
웃음은 무섭다
자신만만하고 거리낌없는
남자다운 웃음은 배워두면 좋지만
아무리 따라해도 쉽게 안되는 것
열성인자를 물려받고 태어난 웃음은 어딘가 일그러져
영락없이 잡종인 게 들통난다
계층재생산,이란 말을 쓰지 않아도
얼굴에 그려져 있는 어색한 웃음은 보나마나
가난한 아버지와 불행한 어머니의 교배로 만들어진 것
자신의 표정을 능가하는 어떤 표정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웃다가 제풀에 지쳤을 때 문득 느껴지는 허기처럼
모두가 골고루 나눠갖지 않는 웃음은 배가 고프다
못나고 부끄러운 아버지들을 뚝뚝 떼어
이 사람 저 사람의 낮짝에 공평하게 붙여주면 안될까
술만 먹으면 취해서 울던 뻐드렁니
가난한 아버지의 더러운 입냄새와 땀냄새와
꼭 어린애 같은 부끄러움을 코에 귀에 달아주면
누구나 행복할까
대책없이 거리에서 크게 웃는 사람들이 있다
어깨동무를 하고 넥타이를 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웃음들이 있다
그런 웃음은 너무 폭력적이다, 함께 밥도 먹고 싶지 않다
계통이 훌륭한 웃음일수록,
말없이 고개숙이고 달그락달그락 숟가락질만 해야 하는
깨진 알전구의 저녁식사에 대한 이해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참고 견디려 해도
웃음엔 민주주의가 없다
다들 어디로 가나
내 꿈속에 오는 빼빼 마른 조상들은
왜 둘씩 셋씩 숨죽이고 앉아
한국식으로 육회를 먹나
피 묻은 쇠고기를 허겁지겁 맨손으로 떼어먹나
손등까지 싹싹 핥아먹고
굶주린 개들처럼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다들 어디로 가나
얼굴도 모르는 수세기 전 사람들과 몸을 섞어
안개처럼 바람처럼
또 어디로 몰려가나
육촌형님은 죽어서도 홀아비고
할머니는 날 전혀 모른다는 듯 웃고 있고
왜 조상들은 제사가 있는 날이면 꼭
상반신만 남아 꿈속으로 몰려다니나
귀신들도 국경이 있나, 정부가 있나
왜 나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증조부와 닮았나
고향을 한참 떠나왔고, 친척도 이젠 없는데
내 가느다란 팔다리마다 최씨들뿐이다
서른다섯 해를 살아도 내 몸엔 온통
가난하게 살다 죽은 최씨들뿐이다
최씨들은 왜 모두 얼굴이 길고
왜 웃을 때 당당하게 남을 똑바로 못 보고 웃나
우리가 죽어서 코끼리들처럼 서로 만난다면
그렇게 모여서 다들 어디로 가나
상아 같은 흰수염을 뽑아 쌓아놓고 우리는
또 어떤 가문에 나서
커다란 귀를 펄럭이며 초원을 떠도나
최씨 종친회
솔밭에 납작한 돌멩이 하나씩 깔고 앉아
사타구니 아래로
꼬리처럼 그림자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가며 노래 한자락씩 하는 최씨 종친회
머리 위에는 돌아가는 저녁 햇무리
서로 닮은 입속에 고기를 찢어 넣어주며
충직하고도 길쭉한 얼굴들끼리
서로 대견하고 서로 안쓰러워
배부른 음식만 자꾸 권한다
묏자리 잘못 옮겨 망한 가족사를 남루하게 걸치고 모여
옛족보에 나오는 유복한 조상의 함자나
퍼즐처럼 제 돌림자에 애써 끼워맞춰보다가
솔밭에 빙 둘러앉아 원을 그리고
하릴없이 수건돌리기를 할 때
언제부터 저 둥글고 쓸쓸한 테두리
유전자 배열처럼 서로서로 꼬인 것들이
저들을 엮어놓고 있었던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건돌리기를 하는 최씨들
그 푸석한 혈통의 새끼줄 따라
돌고 도는 햇무리, 해의 무리들
어디 살든 서로 잊지 말자고, 내년에 또 보자고
낡은 표정 한장씩 서로 품에 끼워주며
사진을 찍으면
눈알마다 어김없이 흘러나와 번지는 붉은색
과부와 홀아비와 고아와 노인만 모였다가 가는
최씨 종친회
석회암지대
밤이면 저수지에선 말조개들이 울었다
거품을 물고 수면에 거꾸로 매달려 이리저리 떠다녔다
시멘트가루 잔뜩 늘어붙은 익사자 살가죽을 벗겨먹으며
우렁이들은 저수지에서 토실토실 여물었다
동굴에서 나온 박쥐들이 몰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다
노인들은 젊은이들보다 오래 살았다
오래 사니까 검은 머리가 돋는다며 생선가시 같은 이빨을 보이던
노파는 자주 뒷산 동굴 구멍으로 들어갔다
농약을 먹은 개들이 논둑을 뛰어다녔고
아이들은 움푹움푹 발이 빠지면서도
밭둑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땅속을 쉽게 들락거렸다
동네는 석회암지대여서
집 밑에는 커다란 땅구멍이 서너 개씩은 미로처럼 나 있었다
누군가 잃어버린 운동화는 십리 밖 하천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마을회관 앞 우물 속에는 늙은 메기가 살았는데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인 누이들은
얼굴 시커먼 청년들에게 제물로 바쳐지곤 했다
분지를 덮고 있는 동그란 하늘에 이따금 꽃이 피기도 했는데
그건 상여가 뒷산을 오르는 거였다
마을의 한가운데엔 구멍 숭숭한 묘지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쪽을 향해 잔뜩 허리 조아리는 대문을 내고 살았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화악, 확, 땅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야, 혼자서 가라
속편하게 가라,
느타리버섯 같은 암세포가
네 항문을 다 파먹고 이미 내장에까지 뿌리내렸다니
자식 걱정, 와이프 걱정 하지 말고
용감하게, 대한민국 육군하사답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진격하듯이
그렇게 가라,
나이 서른여덟이면 피는 꽃도 지는 꽃도 아니지
스무평 전세아파트와
현금 이천만원 남겼으면 됐지
가늘게, 가늘게라도
네 외아들에게 원주 전씨 24대를 넘겨줬으면 됐지
아프다고 돌아누워
애처럼 징징거리지 말고
내가 병실문을 쾅 닫고 돌아서서 나온 것처럼
미련 두지 말고
그깟 생명보험 하나 못 들어둔 거
입을 거, 먹을 거, 다 못 누렸다고 원통해하지 말고
저 밤하늘에
곰팡이 포자처럼 둥둥 떠서
혼자 가라,
주섬주섬 짐을 싸서 이사다니던 그날처럼
저승길 외롭다고 누구 데려갈 생각 말고
돌아보지 말고,
살아서 지겨운 가난,
너 혼자, 너 혼자서, 다 끝내고 가라
—최금진 시집, 『새들의 역사』(창비, 2007)
충북 제천 출생
1994년 춘천교육대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199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8년 제4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2001년 《창작과비평》 신인상
시집 『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
제1회 오장환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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