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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조선일보 시부문 당선작 (조금 늦었지만 괜찮아 / 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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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83회 작성일 26-01-06 15:19

본문

[2026 조선일보 시부문 당선작]

 

 

조금 늦었지만 괜찮아 / 연우

 

 

조카만의 규칙

 

보이지 않는 선을 그려놓고 나는 넘어오지 말라고 한다 아이들은 동시에 여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오른손은 송곳니 없는 개의 입 왼손에는 칼을 쥔다 아직

울지 마요 이모가 바라는 걸 구해올게요 말한다

 

무엇을 구해올 거니?

 

할머니를 구해올 거예요

 

어디에서?

 

할머니 안에서요

 

나는 등뼈 하나를 놓친다

 

데구르르 굴러가다 고모가 밟고 넘어진다

 

고모는 우울증 환자라 실비도 없는데 큰일 났대요

 

울지 않는 아이들은 씩씩하게

 

옷장 속에서 튀어나오고 쌓아둔 방석 위로 뛰어내린다 정말 용감하구나

 

그 안에 뭐가 있었니?

 

방금 전까지

 

할머니가

 

더 낮게

 

허리를 접는다

 

무너지지 않게 손끝으로

 

아이의 말 밑을 받친다

 

조카는 벽을 두드린다

 

벽이 아니라 뻥 뚫린 초원을

 

할머니를 내놔!

 

두 주먹이 하얗다

 

그러면 뱀처럼 얇고 길어진 할머니가 쑥 하고 튀어나올 것처럼

 

사람들의 표정에 대해 간섭한다

 

조카가 손가락질하면 다들 입을 뗀다

 

밥맛이 좋군요

 

비가 오지 않네요

 

그제야 주변이 생겨난 것처럼

 

조카는 옆 호실에 뛰어들어갔다가 하얀 그릇을 손에 쥐고 나온다 그건 돌려줘야

 한단다 하지만 어른들이 내게 쥐여 줬어요 밥을 꼭꼭 씹어먹으라고 했어요

 

아이는 수저로 식탁을 두드리다

 

가장 아낀다는 분홍 스티커를 할머니 사진에 붙인다

 

내가 정말 아끼던 사람이었어요

 

아이니까요

 

아이니까

 

그래서 더 무섭다

 

조카가 내 등을 두드린다 무언가가

 

 

뼛속에서 나오려는 것처럼

 

나는 무릎을 모으고

 

작아진다

 

그제야 조카가

 

기쁜 얼굴로 나를 안아 준다

 

 

[부문 심사평]

 

독자의 마음을 '간섭'하고 '주변'을 만들기를 기대

 

             정끝별, 문태준 시인

 

 

시는 제격의 문()과 문()과 문()을 담지한 언어의 그릇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생각과 마음을 헤아리고 해방시키고 이끌어내는 힘을 가진 문들 말이다. 그런 문들이 빚어내는 새로운 그릇됨, 그러니까 시됨을 가늠하는 일은 분명 설레고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본심에 오른 열한 분의 작품은 역대급 응모 작품 수를 증명이라도 하듯 시적 완성도가 높았다. 최종 논의의 대상이 된 네 분의 작품은 당선작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시적 개성과 완성도를 담보하고 있었다.

 

싱크홀은 시적 사유와 개성이 돌올했다. 삶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싱크홀들, 이를테면 추락 혹은 죽음, 윤리적 파탄을 감각화해내는 시적 통찰과 사유에 힘이 있었다. 때로 설명적 진술이 아쉬웠다. ‘세이브는 가족과 공동체의 해체적 징후를 사회적인 이슈와 연결시키는 묵직한 현실 응시의 시선이 좋았다. 시 창작의 구력이 미더웠으나, 완결된 구조가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남은 두 분의 작품은 오랜 숙의의 과정을 거쳤다. ‘림보는 존재와 부재, 산 자와 망혼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의 징후를 포착해내는 웅숭한 감각이 눈에 띄었다. 끝까지 고민했으나 기시감 있는 아포리즘과 비약적 진술이 마지막 낙점을 망설이게 했음을 밝혀둔다.

 

최종적으로 조금 늦었지만 괜찮아를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할머니(의 죽음과 슬픔)를 구하기 위해 옷장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조카의 활약상은 혁혁하다. ‘간섭하면서 주변을 만들어내는 조카의 무해한 생명력과 무애한 상상력을 통제하는 정련된 메시지와 성찰은 시적 숙련과 시적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이 새 시인이 빚어낼 시의 그릇됨이 많은 독자의 생각과 마음을 간섭하고 주변을 만들기를 기대한다.

 

 

[당선소감]

 

-1996년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수료

 

죽으면 관을 들어줄 사람 여섯이 필요하다. 우리는 벌써 셋이나 있어서 다행이라고 친구가 말했다. 한 명이 죽으면 나머지 둘을 위한 하나를 계속 섭외하자는 제안도. 그 하나가 계속 이어지는 아름다운 세상을 상상했다. 그건 사랑의 방식이 분명했다.

 

내가 신이라면 당신을 특히 사랑할 거야. 당신은 부당하게 불행했으니까.” 에릭 로메르 겨울 이야기의 대사다. 주위에는 부당하게 불행한 것들이 많고 그들을 사랑했지만, 나는 신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서 사랑을 소화하지 못하곤 했다. 불행을 불행으로 보존하는 힘을 조율하는 게 세계라는 걸 곧 알게 됐다.

 

그래서 친구들과 규칙을 만들었다. 슬플 땐 울거나 위로하면 반칙이다. 서로를 웃겨주며 슬픔을 가벼운 비눗방울로 빚는다. 높이 떠오르다 터진 비눗방울의 부산물이 나의 시였다. 여름에는 사랑하는 이들과 눈사람을 만들고 겨울에는 밤수영을 하며 세상을 역행하고 싶다. 우리가 틀렸다는 사람들에게 틀리지 않았다고 천 번 외치고 싶다. 귀신처럼 모든 틀의 밖에서 아름다우면 좋겠다. 시를 쓴 지 15, 딱 인생의 절반이다. 모두의 애착 인형이나 애착 티셔츠가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시 쓸 것이다.

 

내적 동기를 언어로 이끌어주신 조강석 선생님, 사랑의 형태를 알려주신 김지은 선생님, 늘 응원해주신 채호기, 이원, 송종원, 김경후, 정한아, 서대경, 이영주, 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다정한 사랑을 보여준 겸과 지리멸렬한 날들 속 서로를 읽어준 친구들도. 엄마가 좋다고 가르쳐준 건 아직도 최고라고 믿는다. 폭닥폭닥한 캐시미어와 정직한 마음 같은 것. 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오빠는 선함의 천재다. 변방에 있던 제 시의 등을 힘껏 밀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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