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변주 / 정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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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938회 작성일 18-01-31 13:51본문
겨울변주
정다인
모든 현악기의 소리는 누군가의 영혼이다
손을 넣어 휘휘 저어 보면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어스름 속에서
태어난 소리들
공중을 한 켜 한 켜 저며서 일으킨 음들을 얇은 이불처럼 두르고 나는
눈 쌓인 겨울을 걷는다
푹푹 빠지는 발목에서부터 귀까지 목적지 없는 여정을 새겨 넣은
음들의 동면을 생각하면서, 영혼을 투명하게 얼리고 싶은 날들이 있다
어떤 선율은 현악기의 오래된 물관에서 생겨난다는데
보이지 않는 저 굴곡들을 안으로 옮겨 심으면 내게도 음계가 생겨날까
저녁의 눈빛으로 한 음씩 물들어가는 얼굴 위에
음계를 그려본다
제각각의 발소리로 오르내리는 영혼들이 귓속을 스치고
사그락사그락 눈이 쌓인다
눈이 쌓인다
귓속이란 악기 속 같아서 너무 많은 기억이 웅크리고 있다
차가운 발가락을 하나씩 그 안에 담그면
푹푹 빠지던 걸음을 몰고 어딘가로 쏘다녔던 날들이 쏟아진다
폭설, 또 폭설
누군가의 말투 같은 눈발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나는 귀를 기울인다
현을 건드리는 차갑고 골똘한 바람을 따라
떠도는 영혼들의 허밍,
그건 한 음씩 높아졌다가 다시 낮아지는 끝없는 둔갑술
몰려오는 흐느낌은 어디에 매달아 두어야 할까
고개를 한 번도 흔들어 본 적 없는 것처럼,
굳은 목을 한 줄 현으로 걸고
흩날리는 긴 곡선을 어루만진다 선율이 되지 못한 말들, 폭설
또 폭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냉기를 혀 위에 올려두면 귓속엔 멀리서 들려오는
발 벗은 현들의 떨림
아직 이름 짓지 못한 내가 쏟아져 내리는 겨울 한가운데
현악기의 가지들이 일제히 운다
모든 것을 버린 후에야 영혼을 가질 수 있는 걸까
꽁꽁 언 잠 위에 우수수 떨어지는 음표들,
폭설이 쌓인 현악기의 주름 속에서 가늘고 차가운 첫음이 시작된다
시린 발가락을 천천히 내디디면 일제히 울려 퍼지는 내 안의 겨울, 겨울
2015년《시사사》등단
시집 『여자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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