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신문이 있는 이유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한 포기 칠천원까지 값이 뛰었다는 배추들
상추나 부추나 고추나,
날만 조금 궂어도 금추가 되는 것들을 감싸는데는
신문지만한 것이 없다.
영미! 영미!
복날 삼계탕을 끓이는 뙤약볕 아래에서도
팽창의 빙판은 한 조각도 녹지 않고
시상대에선 영미들이 배추 한 포기를 끌어 안는다
군사분계선을 훌쩍 뛰어 넘은 김정은이
보도 다리를 건너가며, 또 배추 한 포기를,
DMZ 철조망을 녹여 만든 십자가를 받는 교황이
포기가 허술한 배추 두 포기를 둘둘 말아 안는다
배추 포기에 베인 수분을 흡수하며
가슴처럼 축축해져서 배추와 밀착하는 뉴스들
거대한 와플처럼 부러지는 빌딩,
에이스를 잡고 눈을 부릅뜨는 트럼프,
우한에서 생긴 우환에 대추처럼 쪼그라든 지구
두 손으로 끝을 잡고 펼치면 한 아름이 되어
담뱃재를 부러뜨리며 버겁게 넘기던 시간들,
아무리 피비린내나는 활자들을 밑동에 뿌려도
포기를 꼭 다물고 꽉 찬 속을 드러내지 않는
한 포기 배추 앞에서 세상은 한겹의 신문지다
둘둘 말아버린다는 것,
모서리 깃을 맞추어 접는 것이 아니라
그냥 둘둘 말아버릴 때가 있다
중심보다 조금 위에 배추를 놓고
딱 배추에 맞추어 아래 위를 접고
배추가 구르는데로 세상만사 접어버리는,
배추가 김치가 될 때까지
배추가 경면주사처럼 붉은 양념을 바르고
허기를 물리치는 밥상 머리의 부적이 될 때까지
시간은 다만 배추 한포기를 감싸안고
배추나 사람이나 속이 찬것들이 흘리는
물빛 활자들을 묵독해야 한다
원래 신문은 한 포기 칠천원하는 배추를
둘둘 말아 싸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댓글목록
이장희님의 댓글

시인님 시를 감상하면서 전 옛추억이 생각납니다.
신문지로 싸주던 생선,돼지고기나, 소고기등 신문지에 돌돌 말아주던 때가 있었죠.
신문지 오려서 일 보고 뒷처리를 신문지 조각으로 했고
어머님은 지금도 야채 다듬을 때 신문지를 깔고 다듬고 그러세요.
신문지에 빅뉴스 사건,사고등이 둘둘 말아지고 깔려지고 그런생각을 못했네요. ㅎㅎ
무적 흥미롭게 잘 꾸며 주신 시를 감상하면서 미소를 짓게 되네요.
주말 잘보내세요.
늘 건필하소서, 싣딤나무 시인님.
싣딤나무님의 댓글의 댓글

언론이 무엇을 위해 있어야 하는지 말하고 싶었습니다.
전달이 제대로 되었는지는 모르겠네요.
감사합니다.
tang님의 댓글

생명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대기 위해 한 가닥으로 있음을 줄기차게 이야기했습니다
난삽도 모독도 형언함도 관념도 한 가닥 타래에 묶였습니다
정처없음은 허황되게 하여 성공적이었으나 한 가닥 줄기에 이입되지 않았습니다
생명줄에서 이탈되는 樂도 환희로움에 이입되지 않았습니다
형언하는 사랑의 낭만이 한 터울 밖에 있다는 자부심이 자부심 다워지지 않았습니다
싣딤나무님의 댓글의 댓글

탕 선생님, 감사 합니다.
상처 받을지도 모르니까 알아듣지 못하게 시평을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 계시는 누구보다 시를 읽을 줄 알고
시를 보는 눈이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tang님의 댓글의 댓글

이타적인 관점이 사물의 용해력과 부합되도록 하여 사물의 영적 요소로 환타지를 부각되게 한 모양입니다
이기적인 관점으로는 용해가 잘 안되어 순리의 복합성과 난해성이 표출되나 봅니다
어쨋든 감사하다고 전해야 하나 봅니다
피탄님의 댓글

글이 종이값을 못하면 그걸 신문이라 부릅니다.
말이 매체값을 못하면 그걸 언론이라 부릅니다.
세상에 가장 천한 직업은 기자가 아닙니다.
기자는 직업으로 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자는 배때지 부르고 엇나간 자선사업가에 가깝습니다.
싣딤나무님의 댓글

기자들 보다는 기사들이 세상을 더 정직하게 만드는것 같습니다.
피탄 선생님! 오랫만입니다.
택시 기사, 택배 기사, 에에스센타 기사 아저씨들이 기자들보다
세상에 더 많은 진실을 말해 줍니다.
대통령 마누라 옷이나 발찌나 뺏지 이야기 따윈 아무도 궁금하지 않은데요